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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1.19 [09:09]
1907-2017 한국교회 집회와 운동 변천사
대각성집회 → 대형집회 → 성경공부
 
송금관

  

한국교회는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도래한 이래,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 해왔다. 복음이 한국에 전해진 것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늦었지만 어언 130여 년의 역사를 지니는 한국교회는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대 사회적으로 교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크고 작은 집회와 무브먼트를 진행해 왔다. 특히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과 1907년 평양 대부흥 11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기독교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뜻 깊은 해로 여긴다. 이에 지난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기억이 될 만한 영향을 끼친 집회와 무브먼트들은 무엇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편집자주>

▲ 한국교회 집회와 운동 변천사     © LA크리스찬투데이

 

 

평양 대부흥운동

 

1907114일 오후7시 평양 장대현교회서는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안수를 앞두고 있던 길선주 장로가 평안도 전역에서 몰려온 1500여명의 신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안수를 앞두고 있던 길선주 장로의 통한의 회개로 시작한 장대현교회 대각성 집회는 한반도 전지역으로 회개와 기도, 성령체험, 영적대각성의 물결로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평양에 모여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리바이벌(Rivival)’ 곧 부흥이라 명명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아주 특별하고도 완전한 간섭이란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이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위상변화와 함께 기적적인 대부흥을 체험하게 된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대부흥을 경험한 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교파와 교단, 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으며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부흥은 교육열, 금연·금주, 우상숭배 퇴치, 여권신장, 기독교학교설립 촉진, 윤리의식 증진, 세계관 정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평양대부흥 때문이었다.

 

백만인 구령운동

 

대부흥이 있은 지 2년 후인 1909년 초 백만인 구령운동(A Million Souls for Christ)’이란 표어를 내걸고 전국적으로 대 전도 운동이 일어났다. 대부흥의 열심이 점점 식어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남감리교의 세 명의 젊은 선교사가 한국 교인들과 함께 그 해 안으로 5만 명의 사람이 회개하도록 하자는 제목을 내걸고 기도했다. 이 해 9월 남감리교선교회 연회에서 그 목표의 수치를 더 높여 ‘20만 구령운동으로 정했고, 얼마 후 서울에서 열린 복음선교회 연합회(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에서 위의 세 사람 중 하나인 리드(Dr. W. T. Reid)의 제안으로 이 전도 운동의 목표가 100만 명으로 높아져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비록 백만 명이 전도되지 못했더라도, 그 목표를 행해 한국교회가 최초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동원해 일치단결해 추진한 최초의 무브먼트였다. 이 운동은 평양대부흥처럼 전적인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이 만난 가장 혹독한 위기 속에서도 민족의 에너지를 한데 뭉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으며, 한국교회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민족복음화라는 거대한 한 가지 분명한 목표로 힘을 결집한 최초의 일이다.

 

전진운동

 

3.1절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후 1920년 한국교회는 전도 운동을 추진했다. 장로교회에서는 이를 전진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 불렀고, 감리교회는 백년 전진(The Centenary Advance)’이라 불렀다. 전진운동은 길선주 목사, 이기풍 목사, 김익두 목사 등이 활약했으며, 이 운동으로 장로교회는 5,603명의 새 신자를 얻었고, 장로교와 감리교 양 교회의 주일학교 수가 1만명에서 14천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핍박과 탄압에 가운데서도 열렬한 전도로 그들의 믿음을 증거했으며, 목사들은 감옥에서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신문화, 과학지식, 사회주의 등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상의 만연과 일제의 탄압이 교회 성장의 위축을 초래했다.

 

3개년 전도운동

 

장로교 총회가 19303개년 전도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첫 해에는 성경 공부 중점, 둘째 해에는 인쇄된 성경 말씀을 공급, 셋째 해에는 교회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이 운동 기간에 <예수의 생애>라는 소책자 140만부를 전도용으로 배포했다. 3개년 전도운동은 신문과 라디오 등 현대문물을 처음으로 이용한 전도운동이었으며, 젊은 층들이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복음화 운동

 

1964년부터 시작된 복음화 운동으로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국 주요 도시와 4만개의 부락에 복음이 골고루 전파되게 하여 온 겨레가 모두 복음을 듣게 하자는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와 김활란 여사를 명예회장으로 각 교단 대표 300명을 회원으로 구성했다. 이 운동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전쟁을 겪는 와중에 침체되었던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기를 벗어나는 시기의 범교단적 연합 운동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해 12월 전국복음화운동기구가 결성되었을 때 로마천주교회와 성공회가 참석해 당시 보수 교단으로부터 복음화 운동이 WCC와 관련해 종교통합 운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대형 전도 집회의 붐이 일어났다. 19735‘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 아래 열린 집회에는 세계적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가 초청됐다. 530일부터 63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집회에는 동참한 교파만도 17개 교단이 넘었다. 첫날에 516천여 명이 운집했으며, 닷새 동안 집회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300만 명에 이른다. 대회장은 한경직 목사가 맡았으며, 결신자만도 무려 2만여 명에 이르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날의 집회는 2천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역사적인 전도의 날이며 한국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감격했다.

 

엑스플로 74(EXPLO 74

 

1974813일부터 나흘간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 엑스플로 74’ 대전도 집회가 열렸다. 대회장 김준곤 목사는 예수 혁명’, ‘성령의 제3폭발의 주제와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준비위원장 윌리엄 브라이트 목사(국제대학생선교회 총재)를 주강사로 초청했다. 1973년에 이어 열린 엑스플로 74’는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위상을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성장일로에 있던 한국교회가 수직 성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당시 열린 두 대회와 관련해서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과 교회의 찢어진 상처를 싸맴과 동시에 한국교회가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80 세계복음화대회

 

1980811일부터 815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다.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염원했다. 주최 측 추산에 의하면 개막일에 250만 명이 참석하고, 연인원 동원은 1700만 명에, 결신자는 70만 명을 얻었다고 한다. 명예대회장에는 한경직 목사와 대회장에는 황재경, 김창인, 김정호, 김종대, 박대선, 김준곤 목사가 맡았다.

 

이후에도 계속된 한국교회의 대형 집회는 1985년 한국기독교선교1백주년대회와 2007년 대부흥1백주년 기념대회로 이어졌다. 1980년대까지 교회 안팎에서 진행된 한국교회의 대형 소형 집회는 한국교회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역할과 대내적으로는 교회 성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바이블 스터디(Bable study)

 

90년대에 들어서는 대형 옥외 집회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부흥회보다는 질적 성장을 위한 성경공부라는 바이블 스터디(Bable study)가 교회마다 바람을 타듯 일어났다. 풍요한 생활문화 속에서 목회자들도 교회의 내실을 다진다는 생각과 교회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해 지식주의 학문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2000년대 이후 기독교신자 증가세가 멈추고 감소현상을 보이며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수십만이 모이는 대형집회는 오늘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 원인에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들 수 있지만 안티기독교 세력들의 거센 도전과 매스미디어의 반기독교적 태도 등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교회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제 한국교회는 500년 전의 종교개혁과 110년 전의 평양대부흥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나부터 회개하고 순수성을 회복해 한국교회의 새로운 정체성을 써내려 가야할 때이다.

 

 

  *LA크리스찬투데이.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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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4 [16:0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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