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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8 [00:14]
탐욕에 눈멀게 하는 권력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한평우

 

사람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게 될 때 그를 지나치게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시오미 나나미는 시이저를 숭배하다 보니 그의 책, 로마인이야기에서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시이저는 분명 역사적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를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다.

수많은 전쟁에서 결코 패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역사가는 시이저는 수많은 고올 족들의 피를 흘린 자라고 말한다. 그가 얼마나 잔인하게 고올 족들을 대했는지 무려 백만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그는 영웅이 될 수 있었고, 그에 의해 죽은 자들의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니 역사의 아이러니이지 싶다.

▲ 키케로가 태어난 집     © 뉴스파워

 

 그런데 동 시대 활동했던 정치가요, 철학자가 바로 로마의 공화주의자인 키케로다. 그에 대하여 사람들의 평판은 극명하게 갈린다.

로마사의 연구로 유명한 독일의 몸젠은 그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겼고, 몽테뉴 같은 사람도 그를 평가 절하했다. 그럼에 비해 어거스틴이나 에라스무스는 그를 탁월한 자로 인정했다. 한 사람을 두고 이처럼 극명하게 평가가 갈린다는 것은 그는 호불호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요즈음 학계는 그를 다시 인정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는 철학적인 삶을 정치적인 삶보다 하수로 여겼다. 키케로는 그리스의 철학자들, 예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지만 그는 로마의 정치계에 있으면서 철학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정치에 반영하였다는 점이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실제로 검증되지 못한 이론은 탁상공론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산, 자연법, 도덕적 평등, 애국심, 공화주의 같은 핵심 개념들에 대해 근대 정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로마에서 100Km 떨어진 프로시노네(Frosinone)근교의 산동네 아르피노(Arpino)에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작은 마을이었으니 귀족이라야 별 볼일 없었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도시의 크고 작음을 판단하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위인이 태어 낳느냐로 구분될 수 있지 싶다. 로마에서 멀지 않는 곳에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그 곳에서 교황이 태어났다고 마을의 자부심이 지금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어떤 위인이 때어났느냐? 로 마을의 무게감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싶다.

 

키케로의 아버지는 동생 퀸투스와 함께 법률 공부를 시키기 위해 로마로 보냈다. 같은 마을에 선배 가이오가 있는데 그는 집정관을 일곱 번이나 역임하였으니 아버지는 어린 키케로에게도 가능성을 심어줄 수 있었지 싶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 아테네로 유학을 보냈고, 키케로는 소아시아의 로도스에서 스토익철학자의 강의를 들었고 저명한 수사학자 몰론(Molon)에게 웅변술을 배웠다.당시 로마의 귀족들의 자제들이 밟았던 지식인의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 키케로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선배 가이오     © 뉴스파워

 

그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관료가 되었고 차근차근 올라가 BC 63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그 당시 중앙귀족이 아닌 시골 귀족 출신이 집정관에 오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집정관으로 반란을 도모한 카틸리나와 동료 다섯 명을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형에 처했다. 당시 시이저는 사형에 반대했는데, 그 문제가 늘 그를 괴롭히는 사건으로 따라다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이처럼 절차를 무시한 일로 인해 평생 힘들게 되는 경우가 있다. 키케로는 그 일로 클로디우스 법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을 당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곧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그 후에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이유는 줄을 잘못 섰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폼페우스, 크라수스가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는데, 그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의 문화는 한번 어떤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면 클리엔트가 되고 그것은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여기는 문화였다. 이런 일은 21세기에도 비슷하다.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선거운동에 줄을 잘 섰다가 한 자리 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기원전 60년대 말, 시이저는 자신들의 정치동맹에 참가하라고 권고했지만 키케로는 이런 동맹이야 말로 위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권유를 거절했다. 또한 기원전 59년에 갈리아 원정을 앞두고 시이저가 자신의 참모로 일해 달라고 했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요구를 들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미래는 더 영화로움을 입었을 텐데 말이다. 시이저가 삼두정치에서 승리함에 따라 그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일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은퇴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제부터는 내 철학적 양심에 따라 여생을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여기저기 매입해 둔별장을 옮겨 다니며 글을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 까 싶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정치에 발을 담그면 쉽게 발을 빼지 못하는 마약성이 있는 것 같다.

▲ 키케로의 고향 아르피노     © 뉴스파워

 

 

키케로는 기원전 44, 시이저가 암살당한 후 정치적 복귀를 꾀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그는 시이저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할 때 로마에 있지 않았고 또한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정했다. 그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인데 시이저가 수백 년 동안 유지해온 공화정치를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이저가 살해당한 후 후계자로 부상한 옥타비아누스를 최대한 이용하려 했고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어찌하던지 꺼져가는 공화주의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키케로가 볼 때 옥타비아누스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었다. 그는 젊은이에게는 칭찬과 명예를 주어야 하고, 그런 다음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이 말을 전해 들었다.그러나 매사에 신중했던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를 어떻게 대했을 까 싶다.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 이었다. 그는 철학은 영혼의 치료사이며, 걱정거리를 없애고,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두려움을 쫓아버린다고 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탐욕을 절제하지 못했고, 많은 재산을 형성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를 달가워하지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자신을 지나치게 과장했고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정없이 비난하고 모략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청렴하였더라면 마음으로 그를 존경했겠지만 말이다. 그는 생전에 많은 돈을 축적했다.거주할 집 한 두 채만 있으면 족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의 집정관 출신 상원의원들 중에는 황제에 버금가는 화려하고 거대한 별장을 소유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몰수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는 제 2차 삼두정치를 합의한 옥타비아누스는 조건으로 키케로의 숙청을 요구했다. 그 숙청의 이유 중 하나가 키케로가 많은 재산을 부정 축재했다는 이유이었다. 그 결정을 듣고 브루투스가있는 그리스로 도망가던 중 127일 나폴리에서 가까운 가에타(Gaeta)에서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3살이었다.

가에 타에는 지금도 키케로의 무덤에 큰 비석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당시의 대단한 지식인이요, 철학자요, 살만큼 산 사람인데, 당당히 자신의 철학의 신조에 따라 정치와 결별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싶다.

그의 머리와 두 손은 로마의 포룸에 있는 연설자들의 연단인 로스트라에 전시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중상모략하고 공격했던 바로 그 자리에 그의 신체 일부가 전시되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 많은 학식과 웅변의 놀라운 재능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그의 치부를 들어내어 청중을 열광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잠시 동안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으나 언젠가는 그로 인한 고통을 자신이 감수해야 된다는 점을 그는 왜 몰랐을까?

 

키케로는 이상국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체제의 안정이라고 보았다.이 것인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안정되지 못한 국가란 늘 불안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고로 한 나라의 통치자는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은 철학이나 이념, 그리고 제도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서인 대화편을 썼는데 이 저서들은 그리스 철학이나 헬레니즘 철학 연구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간주된다. 그가 없다면 헬레니즘 철학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는 우리에게 공화주의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고 철학의 기능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반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정치가요, 철학자이다.그는 시이저에 의해 큰 그늘에 가려져 있으나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인물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늙은이가 되었을 때 어느 날 손자를 방문했다. 손자는 마침 키케로의 책을 읽다가 황급히 겉옷 속에 숨겼으나 아우구스투스는 기어이 그 책을 빼앗아 선채로 다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돌려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는 달변의 웅변가이고 동시에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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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2 [09:0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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