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국제/NGO/언론교계뉴스한 줄 뉴스파워인터뷰오피니언생활/건강연재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7.12.18 [00:14]
생명나눔사역에서 발견한 주의 은혜
박진탁 목사(한복협 중앙위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본부 이사장)
 
박진탁

 

▲ 박진탁 목사     © 뉴스파워

 

 

생명나눔 사역의 첫 시작, 헌혈

대학졸업 이후 우석병원(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에서 원목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집이 있는 가회동까지는 걸어서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인데, 근무하던 3년간을 도보로 출퇴근을 했다. 아침 출근시간마다 1시간씩 걸으며 병원을 가던 습관이 자리잡기까지는 내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음이 크나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 있었다.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 중에는 몇 해를 병석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며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 걷고자하는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원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 작은 바람을 들으며 원목으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내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마음 한편이 무겁기도 했다. 그러나 그또한 걸을 수 있는 일상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다.

 

병원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픈 환자들을 뒤로 한 채 흡사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 문을 나서는 사람처럼 얼마만큼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막 병원을 빠져나올 무렵이었다. 긴박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한 대가 병원 정문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응급실로 유턴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마침 담당여의사 민 선생이 난처하고도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맹장이 터진 복막염 환자예요. 길거리에 쓰러져 신음 중인 것을 경찰이 데려왔대요. 빨리 수술하면 살 수 있을 텐 데...” 당시에는 수술에 필요한 혈액 비용을 반드시 선불로 받는 것이 모든 병원이 관례였다.

 

혈액 비용을 지불할 길이 없는 환자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난처하고도 급박한 상황에 때마침 내가 제 발로 응급실로 찾아 들어온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할지 묻는 담당의사의 눈빛을 나는 충분히 읽을 수가 있었다. 피 값을 대신 선납해주고 싶었지만, 주머니가 비어있어 망설이고 있던 나에게 민 선생은 나의 혈액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B형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 선생의 두 눈이 커졌다.

 

이 또한 하나님의 더 큰 뜻이며 사랑이었을까? 마침 실려온 행려환자가 나와 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당장 그 자리에서 팔을 걷어 올려 수술에 쓸 380cc의 피를 뽑았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한 첫 번째 헌혈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체험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15일이 지나 나에게 수혈을 받은 22살의 젊은이가 퇴원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내 피가 이 젊은이의 몸속에 흐르고 있겠구나. 그렇다면 그의 생명이 나와 함께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 젊은이를 위해 헌혈을 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위하여 피를 모두 흘리신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나의 삶에 큰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하나님 왜 저에게만 이런 감동을 주십니까. 이 감동을 온 국민과 함께 공유 할 수가 없을까요?” 이러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삼각산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는 중 그럼 네가 이 운동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는 하나님이 쓰시는 활이요. 내가 하고자 하는 운동은 화살이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 분은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당신의 손으로 나를 구부리시는 것이리라. 기도를 통해 생명나눔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쳐 쓰여질 것임을 깨닫게 됐다.

 

본격적인 피 주기 운동의 시작

1969년 당시는 헌혈이란 개념이 없었기에 피를 주는 운동이라고 칭하고 시작을 했다. 196812월부터 시작한 증혈운동은 당시 증혈이라는 용어가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아 19694월부터는 피 주는 운동이라고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9715일에는 한국헌혈협회를 창립하고 이사진을 구성하여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게 됐다.

 

각 교회를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헌혈로 실천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캠페인을 전개했다. 19703, 부활주일에는 영락교회에서 헌혈에 대한 설교를 전했고, 같은 해 419일에는 명동성당에서 미사 강론 실시함을 계기로 (당시 이문근 신부) 전 교계에 헌혈운동이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다.

 

군 병원 혈액을 헌혈로 모두 충당

19701212일 정신여고에서 여고생들을 대상으로 성탄 선물은 카드 대신 헌혈로!’라는 설교를 했다. 그 설교를 들은 학생 중 75명의 학생이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헌혈에 참여한 학생들은 직접 혈액을 들고 국방부 차관을 찾아가 전달했다. 그 일은 군에 큰 감동과 충격을 안겼고, 그 후로 당시의 정래혁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물론 별을 단 장성들이 헌혈에 앞장서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피를 구입해서 사용하던 연간 예산도 없애고, 헌혈을 하면 45일 간 휴가를 주는 제도도 없애는 등의 강력한 헌혈제도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군의 피 수요량은 전량 헌혈로 충당될 수 있었고, 현재는 민간을 위한 헌혈까지도 진행하고 있다.

 

최초의 헌혈의집이 문을 열다!

서울시의 협력을 받아 당시 광화문 지하도 관리실(24)을 무상 임대받아 1971915일 국내최초의 헌혈의 집을 오픈했다. 헌혈의 집에는 각 시립병원의 의료진이 상주하여 채혈업무를 담당하고 헌혈된 혈액은 각 시립병원에 무상으로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각 대학 및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헌혈에 필요성을 알리는 강연, 설교 등을 실시해 광화문 헌혈의 집으로 와서 헌혈을 하도록 홍보했다. 이에 헌혈의집에는 하루 종일 헌혈자가 끊임없이 찾아오고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헌혈의 집의 인기로 받은 혈액을 모두 소모할 수 없는 형국에 이르자 당시의 협회 이사장이며 병원의 임상전문의였던 김 이사장이 서울시를 찾아가 지하도의 헌혈의 집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다. 헌혈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그 사건으로 국내 최초의 헌혈의집은 그 해 1030일에 문을 닫게 된다.

 

당시는 헌혈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기였다. 피를 돈 주고 파는 매혈 성행하던 시기였기에 을지로에 있었던 가장 큰 매혈병원은 피를 사고파는 행위로 그 후 대형병원으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혈액사업을 하는 적십자사도 마찬가지였다. 매혈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헌혈사업이 활성화되는 것을 반기질 않았다.

 

헌혈은 나날이 활성화되어갔지만, 나의 가정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생활비는커녕 부모님에게 오히려 빚을 져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헌혈초기에 몇몇 분들이 경제적인 지원자가 없다고 하니 굶어죽을 수도 있는 그런 일을 그만두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던 1974년 어느 날, 당시 적십자사의 사무총장이었던 서영훈 총재께서 박 목사 고생 그만하고 적십자사에 와서 함께 헌혈사업을 감당해 달라.”라고 하여 고민을 하다 적십자사의 혈액원 헌혈 사업과장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적십자사에서 본격적인 헌혈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새로운 사명을 받다

헌혈사업을 시작한 16년이 지난 1985년 우리나라에서 드디어 필요한 혈액의 공급이 100% 헌혈로 충당되었다. 나는 그맘때쯤 아내와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인 남매를 데리고 미국 LA 이민길에 올랐다. 미국 LA에서 생활하던 중 만난 옛 친구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3일 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담당의사는 뇌사가 되었다며 사망으로 인정하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라고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때, 의사가 가족들에게 장기기증 의사를 생전에 표시하지 않으셨지만, 가족들이 원하시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아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중학교 2학년인 친구의 딸이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인정하는 일이 어렵지만, 이제 하늘나라에 가신다고 생각하면 장기기증이 뭐가 어려워요. 아빠의 건강한 심장이 다른 이에게 옮겨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아빠의 각막이 누군가에게 이식되어 세상을 밝히 볼 수 있다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엄마, 우리 장기기증하기로 해요.”라며 엄마를 설득하고 나섰다. 결국 그 다음날, 친구의 가족들은 장기기증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친구는 7개의 장기를 기증하며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장기기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강한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 온 이유를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장기기증’, 생명을 살리는 이 일을 고국으로 돌아가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미국에 가족들을 둔 채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생명을 나누다

한국에 들어와 장기기증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서는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자주 떠올랐다. 두 달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헌혈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해주셨고, 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셨고, 또한 고국 땅에서 생명을 살리는 장기기증운동을 최초로 시작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기도하던 도중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는 로마서 121절의 말씀을 받았다. 그때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당장 순종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991124일 신장 하나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기증했다. 그렇게 내게는 국내 최초 순수 신장기증인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생겼다.

 

그 이후 장기기증운동을 펼치던 공덕동에 위치한 12평짜리 오피스텔 사무실에는 매일 매일 수십명의 기증희망자와 이식희망자가 찾아왔다.

 

이 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아무런 대가없이 신장을 기증한 일이 이슈가 되어 언론사의 인터뷰도 쇄도했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면 대부분이 신장 하나를 기증했는데, 생활하는 데에 지장이 없느냐는 질문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신장을 하나 떼어내는 수술을 했는데, 안 아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동안 옆구리에 생긴 상처가 아물지 않아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 아무는 데에 2주면 된다던 상처가 3주가 지나도 아물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에는 40일간이나 치료를 받은 후에야 상처가 제대로 아물었다.

 

하나님께서 이 아픔을 통해서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 신장기증 결연사업을 하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경험을 통해 지혜를 주셨다. 나와 같이 수술한 후에 상처나 다른 여타의 이유로 몸이 아픈 기증인이 발생할 수 있는데, 기증 후에도 그들의 건강을 잘 관리해주기 위해서 건강관리기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건강관리기금 구좌를 만들어 모금을 시작했고, 기증인이 기증을 한 것 때문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언제든지 치료해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은 2억 정도의 기금이 조정되어 있어 매년 천만 원 정도를 기증인을 위한 기증 후 건강관리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일간지 오보, 장기기증운동에 위기가 찾아오다

1995320, 모 일간지 (당시 석간) 1면에 머리기사로 사랑의 장기기증으로 돈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고, 21일에는 ‘2천만 원 선불 강요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하루는 전면에, 다음날에는 양면 전체에 13일간 태풍과 같은 엄청난 기사가 쏟아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11시경 첫 보도가 나간 후 전 일간지 및 방송국에서 사무실에 들이 닥쳤다. 언론사들이 물밀 듯 몰려들 때에 나는 경리장부를 꺼내놓고 하나하나 해명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우리 단체를 신뢰했는지 이야기를 듣고는 염려마세요.’, ‘용기를 내세요.’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간 기자들이 많았다. 그러한 언론사에서는 관련된 기사를 한 글자도 싣지 않았다.

 

그 기사가 나갔을 무렵에는 신장을 주고받은 기증인과 이식인이 총 360명 정도였는데, 검찰에 하루 10명씩 2달 가까이 직접 불러 조사를 했다. 조사가 모두 끝난 후, 본부는 단 한건의 혐의와 잘못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는 정정 보도를 요구했고, 법원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당시 오보를 낸 언론사에 정정기사를 낼 것을 지시했다. 1면에 났던 기사는 똑같이 1면에 활자크기까지 지정하여 잘못된 내용을 정정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내지에 있던 전면 기사 역시 전면에 해당하는 반론문을 게재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법원의 판결문이 도착한 직후에 발간되는 신문부터 연속 13일간 정정 보도를 하라고 판결이 났다. 만일 이행치 않은 경우 이행할 때까지 하루에 550만원씩 원고에게 지불하라는 판결이 덧붙었다.

 

그 신문사의 사주격인 O목사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왔지만 나는 쉽사리 그 사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보로 인해 본부 뿐 아니라 기증한 이들과 이식받은 이들까지... 피해를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부를 항상 응원해오던 많은 목사님들께서 고린도후서 518절의 말씀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는 성경구절을 이야기하며 나에게 용서하라고 권면하셨다. 용서는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며 나에게 적극적으로 권면해 나는 그 목사님의 사과 받아들이고 그 신문사가 제공하는 5억 원의 위자료를 받았다.

 

골수 기증운동을 시작하다

1993318옥한흠 목사님을 주축으로 골수은행이 창립되었다. 그해 4월에는 병원협회 사무실에서 골수이식 전문의들과 함께 골수기증 희망자를 등록을 받을테니 등록자들의 HLA검사(조직적합성검사)를 해줄 수 있느냐는 의논을 하게 되었다. 의사들은 그 제안을 대환영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검사비였다. 의사들 중 한 명이 검사비가 확보되어 있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골수 기증을 희망하여 등록하는 사람들에게 검사비를 내고 등록하라고 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눈이 휘둥그레진 한 의사가 검사비가 얼마인지는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25만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이 끝나자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제정신인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25만원이라고 하면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생명을 살리겠다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내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면 검사비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실제로 그때까지 24명의 기증희망자가 자비로 25만원을 들여 HLA검사를 해 골수 기증등록을 했다.

 

이런 뉴스가 미국에까지 알려지면서 미국 시애틀에 입양을 갔던 4살의 한국인 소녀 리틀 퀸의 골수기증자 찾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골수를 시급하게 기증받아야하지만 미국에 있는 300만명이나 되는 기증희망자들 중에서는 리틀퀸과 HLA가 일치 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안타까운 마음에 고국에까지 의뢰를 하게 되었고, 때마침 강동성심병원에서 연구목적으로 20여명 HLA 검사를 했는데 그 중에서 일치되는 사람이 발견되었다. 그 사람은 곧장 시애틀까지 가서 골수를 기증하고 왔고 그 일은 당시 큰 이슈였다. 그때에 리틀퀸에게 골수를 기증한 이는 당시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김효섭 씨였다.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기적적으로 골수 예산이 편성되었다. 당시의 경제기획원 이석채 예산실장이 뉴스를 통해 접한 골수기증운동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75천만 원의 예산을 편성해 보건복지부에 보낸 것이다. 이 예산은 원래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지급해 사용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당시의 복지부 의정국장이 예산 집행을 일부러 늦추는 일이 있었다. 예산 집행을 미루면서 자신의 의과대학 후배 두 명에게 청와대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부조리한 정황이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게 종용했다.

 

이 일로 인해 예산이 다시 복지부로 돌아오게 되고, 결국 골수기증협회라는 단체를 급히 조직하여 그곳에 10월 경에 예산 집행을 하게 되었다. 당시 75천이나 되는 예산이 원래 계획대로 본부로 집행되었다면 우리나라의 골수 기증 운동과 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조직은행이 설립되다

1968년 헌혈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관련법은 2년 후에 제정되었고, 1991년에 첫 출발한 장기기증 운동도 2000년이 되어서야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골수기증 역시 캠페인은 본부가 1993년에 시작하였으나 1994년에 예산이 편성되면서 본격적인 진행이 이루어졌다.

 

이같이 국내의 생명을 나누는 운동은 본부에서 주도해 왔지만, 제도가 만들어진 후에는 여러 단체들이 출범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기기증운동 역시 시작된 지 10년 뒤에 법이 제정되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형국이 되어 관련 제도들이 경직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조직기증 역시 당시 국내에는 관련법이 없었다. 그러나 외국의 여러 기관에서 조직기증을 시행하고 있는 것은 알게 되어서 이 분야에 의료 경험이 풍부한 치과의사를 만나게 되었다. 조직기증을 시작하기 위해 인천의 길병원에서 장소와 시설을 제공했고, 의사인 엄 선생이 의료기술을 제공했으며, 본부는 시신기증을 적극 홍보해 받는 일을 담당하게 되면서 1999624일에 최초로 한국조직은행을 설립되게 된다.

 

조직기증이란 70세 미만의 건강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에 시신을 기증하면 12시간 안에 피부, , 혈관 등을 떼어 내어 재활용 하는 것을 말한다. 기증된 시신에서 피부를 채취하여 재활용 할 수 있는 형태인 알로덤이라는 피부 이식제를 만든다. 화상을 입은 환부에 이 알로덤을 발라주면 화상 흉터가 치유되는 것이며, 뼈는 부위별로 채취하여 밀가루처럼 가루로 만들어 부러진 곳을 때우기도 하고 으스러진 부분을 갈아 끼우기도 하는 등 많은 조직을 재활용해 필요한 사람에게 보다 삶의 질과 건강을 선물하는 일이다.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선물하고자 설립된 조직은행이 시작된 지 1년쯤 지났을 무렵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에 의술을 담당한 엄 선생이 영리목적으로 조직은행을 운영하게 되면서 본부와는 안타깝게도 결별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본부는 꾸준히 시신기증운동을 전개하여 한해에 10여구씩의 시신을 기증 받았다. 그런데 영리목적으로 조직은행을 운영하여 본부와 이별했던 엄 선생이 서울에 별도의 조직은행을 만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본부와 각 지부에서 기증받는 시신을 교묘하게 빼가기 시작한 것이다.

 

조직은행, 본부에 큰 위기를 가져다주다

서울조직은행의 엄 선생은 계속 시신을 기증받기 위해 본부 직원 9명을 매수하기에 이르렀다. 여직원들을 자주 속상하게 했던 총무과장을 몇 차례 훈계했더니 사표를 내고 본부를 나갔다. 그가 간 곳은 다름 아닌 엄 선생이 있는 서울조직은행이었다. 그 밑으로 들어간 총무과장이 우리 직원들을 하나씩 포섭해 시신을 빼돌리는 데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내 비서가 6개월간 엄 선생으로부터 150원을 받고 모든 서류를 필요할 때마다 발송해주었고, 총무부장은 승용차 한 대를 받았고, 사직한 전 총무과장은 2년에 걸쳐 145백만 원이라는 돈을 받았다.(이러한 사실은 엄 선생이 긴급 체포되어 재판과정에서 압수된 서류에서 확인된 것이다)

 

2000년 가을, 어느 날 서울지검에서 한 검사가 전화가 와 서초동에 오실 일이 있으면 언제 들려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며칠 후 갈 기회가 있으니 그때 들리겠다.’고 약속하고는 그 검사를 찾아갔다.

 

그의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하니 한 수사관이 나와 동행했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 왜 동행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이 있다고만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사의 질문은 터무니없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내가 그 질문들을 받고는 말씀을 삼가시라고 충고했더니 검사가 두 사람을 불러왔다.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본부의 총무국장과 전 총무과장이었다. 검사는 자신이 한 질문들이 모두 그 두 사람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 뒤 안 사실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꾸며 검찰에 출두하면서 언론에 홍보자료까지 낸 것이 아닌가. 그대로 있다가는 긴급 구속이라도 당할 태세라서 나는 결백을 주장하며 더욱 호되게 검사를 몰아부쳤다.

 

그 후 사무실에 돌아와 나는 여러 가지 자료를 검토했다. 자료를 검토하면서 업무적으로 미진한 것들을 발견했다. 당시 많은 유인물을 만들면서 현금 지불을 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때 인쇄소로부터 몇 %의 돈을 다시 돌려받은 것이다. 그 돈을 돌려받은 직원들이 나눠 쓰고 난 뒤에 이 일을 내가 시켜서 했고, 돈을 되돌려 받아 다 나에게 주었다는 등의 내용을 꾸며냈다. 이런 틈을 타 인사에 불만을 품었던 몇 직원은 노조를 결성하였고, 전 직원을 노조원으로 만들어 내부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강남의 어느 교회 부목사가 본부를 통해 이식을 받게 되었는데, 이식을 받은 지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담임목사와 장로 두 분이 본부를 찾아왔다. 그리고 부목사의 생명을 살려준 것에 보답하고 싶어서 교인들이 2개월간 헌금을 모아 2천만원을 후원금을 조성했다며 본부에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사실이 내가 그 교회로부터 3천만원을 받기로 미리 약속을 한 후 신장이식을 시켜준 것으로 둔갑되어 있었다. 그리고 3천만 원 중 1천만 원은 내가 개인적으로 취득하였다고 상담실 직원 3명이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직원들이 이사회 회의록도 모두 내가 지시했다고 고쳐놓는 등 전 직원이 다 같이 불리한 증언만을 쏟아내는 바람에 구속되어 2개월 만에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6개월을 선고 받았다.

 

고난 중에 은혜를 발견하다

60일간 구치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로 반대편으로 머리를 두고 세 사람씩 엇갈려 잠을 자고, 창살 틈으로 들어오는 음식을 받아먹고, 화장실 겸 주방에서 설거지도 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신참이라 늘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해야 했는데, 거의 매일을 눈물로 설거지 하는 것 같았다.

 

언론을 통해 나를 미리 알고 있던 구치소 사람들이 나에게 장기 매매로 얼마를 벌었느냐는 등 질문을 하기 일쑤였다.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좁은 방안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는 등 온종일 운동을 하며 상념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많은 분들이 구치소로 책을 보내주어 책을 읽는 시간 역시 많았다. 그리고 성경을 보기가 민망한 순간들이 있어 나는 모두 다 잠든 시간에만 성경을 봤다. 60일간 매일 한권씩의 성경을 읽게 되자 구치소에서 나올 무렵에는 66권의 성경을 모두 읽게 되었다.

 

자녀들은 꾸준히 편지를 보냈다. 편지 속에는 아빠 그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잖아요. 푹 쉰다는 생각하고 편히 지내세요.’라는 위로의 내용을 적혀있었다. 편지받고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판을 받는 동안 실무진에서 떠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상임이사직을 계속 맡았고 지금은 상임이사 겸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당시 이사회에서는 행정적으로 미흡한 점은 있었지만 본부의 재정에 손실을 보게 한 것은 없다는 판단을 해 나를 다시 복귀시켰다.

 

하는 일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의논을 하던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배신하는 가슴 아픈 일도 겪었다. 신학교를 같이 다녔고, 상의할 일이 있으면 한 달에 두 번씩 만나곤 했던 세 친구 중 한명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섬기던 교회의 성도를 우리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고, 그의 딸도 직원으로 채용했다. 헌혈운동을 접고 장기기증운동만 할 때에도 적십자사와 연계하여 헌혈운동도 하게 해 생활에 도움을 준 다정한 친구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강원도의 어느 고을에서 쉬고 있는 김 목사를 본부 직원 2명이 찾아갔다.

 

그 직원들은 김 목사를 붙잡고 나를 매장할 방법을 의논하려고 하니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내 절친한 친구였던 김 목사는 그 직원들에게 너희가 생각하는 비리가 있으면 다 수집해 와라. 함께 해보자.”라는 말을 했다. 김 목사는 당시 엄 선생이 만든 서울조직은행의 이사장이 되어있었고, 3천만 원이라는 돈을 엄 선생으로부터 받은 직후였다. 엄 선생은 나의 친구까지 끌어들여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공작하고 있었다.

 

몸이 성치 않아 자신은 심약해지고 있는데 친구인 내가 전국을 누비며 활발하게 일하는 것이 질투가 나서였을까. 나는 아직도 그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에 동참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친구가 많이 아프다고 하여 선물 꾸러미를 갖고 찾아갔다. 그리고는 우리 사이에 좋은 일만 생각하고, 서운했던 지난 일은 다 잊자고 한 후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6개월 지난 어느 날,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병원으로부터 듣고 가족보다 먼저 병원에 달려갔다. 차디찬 친구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도를 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나를 본부에서 몰아내려고 선동했던 세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을 겪으며 나는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기사를 늘 상기했다. 로마서 1219절의 말씀인 원수를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하는 구절을 계속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김 목사가 나를 배신했던 그 사건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 후 출신학교에서 한신상을 받았고, 영곡봉사상을 받았고,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로부터 의인상까지 받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공격했던 그 아픔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창세기 479절에 나오는 야곱이 바로 왕을 만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라고 말하는 내용을 기억하면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다. 주님 앞에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지금까지 건강히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게 해주신 것에 한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다.

 

돌이켜보면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 늘 많았다. 한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보니 그 고난의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축복의 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느라 늘 바빠 가족들의 일에는 발 벗고 나서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하버드대학 다니던 아들이 최근에 하버드대 의과대학 대학원 (tenure)종신교수(biomedical informatics)가 되었다.

 

또한 나 역시 단련의 시간들을 거쳐 80세가 넘도록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사역을 하게 되었으니 어려운 시간을 지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지금은 몸소 체험하며 살고 있다.

*이 글은 지난 10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 기도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7/11/11 [12:26]  최종편집: ⓒ newspowe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
[박진탁 목사] 생명나눔사역에서 발견한 주의 은혜 박진탁 2017/11/11/
뉴스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7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