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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0.19 [09:04]
“사랑을 쏟아부어주신 신앙의 선배님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회장)
 
김명혁

부족한 죄인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신앙의 선배님들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회장)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나는 지난 96알 아침 신앙의 동료 몇 분들과 함께 모여 조찬을 하면서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나의 한 평생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나에게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부족한 나에게 김관주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 방지일 목사님 들께서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내 말을 듣고 있던 최일식 목사님이 내가 11살 때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한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게 하셨다는 설명을 했다. 나는 속으로 그렇다고 동의를 했다. 사실 나는 부모님을 떠난 어린 시절부터 한 평생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날 아침에 한 이야기들과 그 때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적어본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너무너무 좋으신 분이시지만, 특별히 고아와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돌아보시는 고아들의 아버지와 같으신 따뜻하고 좋으신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10:17-19).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68:5).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103:13).

 

첫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어머니와 주일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 신의주에서 아버지(김관주 목사)와 어머니(유춘택 사모), 여동생(김명신)와 함께.     ©김명혁 목사 제공


나는 19488월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오기 전부터 자주 감옥에 가 계시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반 고아와 같은 외로운 삶을 살았다. 나는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을 평안북도 신의주와 평양에서 살았다.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의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었고 나중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2년 동안 담임 목사님으로 사역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의주에 있을 때나 평양에 있을 때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였는데 아버지는 신사참배 반대와 공산정치 반대로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의주에 있을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서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이아버지이!”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때 내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였다.

나는 감옥에 자주 가 계시는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면서 반 고아와 같은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는데, 그때부터 나는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자주 가야 한다는 것을 눈과 몸으로 보고 느끼면서 배우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잔소리는거의 하시지 않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으셨다. 때때로 나를 칭찬해 주시고 격려하신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나의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귀중함을 고스란히 몸과 마음에 체 받게 되었다. 슬프면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 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다.

나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탄광을 찾아가곤 했는데 남루한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뵌 기억이 난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전수받았다. 평양은 최봉석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께서 19444월에 순교하신 곳이었고, 아버지께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 즉 1950623일경에 순교하신 곳인데, 나는 이런 귀중한 분들로부터 순교신앙을 조금이나마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많이 사랑했고 순수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는데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부를 잘 하라고 타이르는 일도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주셨다. 나는 나를 믿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깊은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 잔소리보다는 순수한 사랑과 격려가 그 무엇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자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짜증과 불쾌감을 지니고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나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들이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다. 세분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부족한 나에게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했다. 주일날 공부를 하지 말고 물건이나 음식을 사지 말라고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물건이나 음식도 사지 않았고,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했고, 순교신앙이 제일 귀중한 신앙이라고 하면 순교신앙이 제일 귀중한 신앙이라고 받아드렸고, 교회에 와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라고 하면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했다.

결국 나는 평양 제 오 인민학교(초등학교)2년 동안 다니면서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렸다.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기도하라고 하면 내가 제일 먼저 기도를 하곤 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에는 늘 참석을 했는데 때때로 나가서 간증또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뛰어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는데 나를 권하거나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나는 잘 안다.

내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한 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다. 나를 믿어주시고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아버지께 나는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또한 나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나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다. 어머니는 맏아들을 내버리시는 희생적인 아픔의 사랑을 스스로 감수한 것이었다. 나의 장난꾸러기적이고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가 내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다. 나를 믿고 나를 멀리 떠나 보내신 슬픔과 아픔과 이별의 사랑을 나에게 쏟아 부어주신 아버지와 어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린다.

나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슬픔과 아픔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캄캄한 밤에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가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우리 일행을 향해서 모두 손을 들고 서라고 명령했다.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다.

그러나 나는 설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예배 드리기 위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언덕을 넘고 긴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해서 달렸다. 나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다. 아마 3,40분 동안 달린 후 나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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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 후 나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 없이 모험적으로 뚫고 나아가는 막가 파의 삶이 나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다. 어렸을 때 어떤 삶을 사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난 밤에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젊은이가 나에게 다가 오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누구하고 가냐고 물었다. 나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서울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나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결국 나는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다.

서울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화려한 모습에 감탄했다. 그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38선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서울역에서 서울 중구 회현동 245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다. 그곳에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의 집이 있었다. 사실 내가 주머니에 넣고 온 것은 이모님의 주소 한 장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후에 나를 서울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 그 청년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청년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은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다. 주일에는 영락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주일 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평생 부족한 나에게 사랑과 은혜로 쏟아 부어주신 귀중한 스승이 되셨다. 신의주 제이교회 출신인 김익순 장로님도 나를 따뜻하게 만나주시고 대해주셨다.

나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나는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내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어떤 친구가 나를 계속해서 놀려서 내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나하고 싸움을 하자고 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였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그 친구를 때려 눕혔다. 내가 이겼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나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운동도 싸움도 공부도 내가 잘했기 때문이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서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평생 신앙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나는 공부도 잘 해서 그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선생님들의 말씀도 잘 들었다.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나의 삶의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변영태 교수님(후에 총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변영태 교수님은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권면했다. 치약도 절약해서 사용하라고 했다. 나는 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터라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려고 평생 힘썼는데 나는 지금도 양치할 때 치약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한다.

내가 서울에 와서 엉뚱한 일을 하나 한 일이 있었다. 중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을 하는데 구청 직원이 나보고 내 이 어디냐 라고 물었다. 나는 이 생각나지 않았다. 얼떨결에 내 본이 남양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평양에 있을 때 남양 군도에 살던 토인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갑자기 남양군도가 생각나서 나의 본이 남양이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사실 내 본은 김해인데 나는 평생 남양김씨로 살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에서 은퇴 기념논총을 출판하면서 그 책 제목을 남양 김명혁 박사 교수 은퇴 기념 논총, 복음주의와 한국교회라고 정했다. 내 딸은 남양김씨 가문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중구청에 내 남양으로 되어있다.

 

둘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이성봉 목사님과 몇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 월남한지 2년 만인 1950625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미국 비행기 B29의 폭격도 눈 앞에서 목격했다. 내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쓸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나는 전쟁의 불행과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모부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의 봉고차를 함께 타고 사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차를 타고 또는 걷기도 하며 힘들게 피난을 가는데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갔으니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에서도 폭탄이 터지고 길가에 쓸어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부산에서 몇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셋방 하나를 얻고 조그만 한 방에서 6명이 함께 사는 불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서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다. 셋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다. 결국 나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다. 나는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님이 어린이 사역을 담당하시고 어린이 사역에 관한 모임도 주관하셨는데 나는 그 때부터 안성진 목사님을 평생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때 대구에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뻘 되는 주명숙 이라는 고등학생이 나하고 누나/동생을 맺자고 제안했다. 나를 귀엽게 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내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다. 나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누나는 나를 누나 집에 자주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내 손수건도 빨아주었다. 누나는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 사과 껍질을 깎는 법을 누나에게서 배웠다. 즉 칼로 사과를 톡 친 다음 껍질을 깎는 법을 배웠는데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사과 껍질을 깎곤 한다.

내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 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깊은 사랑과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거의 매번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사랑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곤 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개학 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된 것이었다.

아마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은 참석한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 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다. 때때로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다.

나는 늘 앞 자리에 앉아서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을 듣곤 했는데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나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금방 암송해서 읽곤 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내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들 중의 하나는 시50: 15말씀이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성경 말씀을 금방 암송해서 읽을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나를 칭찬하시곤 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 기도를 받았다
.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라고 반가워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시곤 했다. 아마 안수 기도를 12번은 받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죄밖에 없는 부족한 사람이 목사님이 되어서 평생토록 목회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 기도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너무너무 축복된 일이었다.

나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대구 어느 교회에서 미국에서 온 잘비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통역을 하셨다. 나는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었는데 잘비스 목사님이 회개는 혼자서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라고 권면했다.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다.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회개의 중요성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내가 무슨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는지 기억이 되지 않지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진지하게 회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과 목사님들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들음과 순종의 은혜를 받은 것 같았다. 듣는 귀를 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귀중한 은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는데 결국 20005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라는 제목으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 강의가 책으로 출판되었다.

부족한 죄인에게 이성봉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 받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른다. 나는 후에 이성봉 목사님의 딸 이의숙 권사님과 친밀하게 교제했고 이기풍 목사님의 딸 이사례 권사님과도 친밀하게 교제했고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 장로님과도 친밀하게 교제했고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과도 친밀하게 교제했다.

내가 대구에서 사는 동안 이모님과 이모님의 친구분의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된 이야기를 하나 더 한다. 이모님의 아들인 나의 사촌 동생을 내가 잘 가르쳐주어서 공부도 잘 하고 착하게 되어서 내가 이모님의 사랑과 칭찬을 받게 된 일이 있었고, 이모님의 친구의 아들이 좀 못된 아이였는데 나보고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해서 내가 잘 가르쳐주었더니 공부도 잘하고 착하게 되어서 내가 이모님 친구 분으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게 된 일이 있었다. 그분은 나에게 천사라는 말까지 했다. 나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왔다.

한번은 이모님이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쳤는데 이모님의 집이 지금 복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함께 살고 있는 소년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와서 나를 보고 너무너무 좋아하고 기뻐하면서 나를 더욱 더 사랑하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 때 나는 점쟁이도 제대로 아는 것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랜 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즉 신반포 집을 팔고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집 사람이 복덕방에 가서 집을 팔려고 해도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느 복덕방에 가서 집을 팔려고 했더니 며칠 안에 팔렸다. 어떤 사람이 신반포로 이사를 오려고 하는데 어느 점쟁이가 신반포 아파트 16207호 집에 가서 살면 복을 받게 된다고 해서 집을 사게 되었다고 복덕방 주인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또 점쟁이도 제대로 아는 것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고와와 나그네로 외로움을 조금 몸에 지니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 받으면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왕자병에까지 걸리게 되었다. 사도 요한의 후예가 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서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의 사랑과 은혜와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서 살게 되었고, 후에는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 방지일 목사님들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와 칭찬과 격려와 축복을 받으면서 살게 되었고 나중에는 강원용 목사님, 이중표 목사님들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와 칭찬과 결려와 축복까지 받으면서 살게 되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고 신앙의 선배님들과 여러분들의 사랑과 은혜와 도움의 손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셋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김치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을 보냈는데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면서 김치선 목사님 밑에서 보다 철저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사모의 영적 유산을 계속해서 보물로 물려 받았다.

김치선 목사님은 한국의 예레미야이셨고 회개운동과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다. 나는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를 열심히 드렸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게 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찬송을 부르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셨고 그리고 28천 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셨다. 나는 그때 중구 회현동에서 살았는데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남산에 올라가서 30여분 동안 더 성경을 보며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와서는 아침 밥을 먹고 30여분 동안 걸어서 서울 고등학교를 다니곤 했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는데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 부흥회까지 따라다니곤 했다
. 주암산 부흥회 때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라는 찬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피 흘려 사신 교회라는 가사에 깊은 감동을 받고 너무 고마워서 울고 또 울었고 늘 사랑합니다라는 가사에 늘 사랑하지 못하는 잘못을 뉘우치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다. 옆의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 있어?” 라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었다. 주암산 부흥회에 함께 참석했던 김치선 목사님의 아들 세창군이 나보고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해서 안수기도를 해준 일도 있었다. 교회에서 매년 년 초마다 3일씩 금식 기도를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금식기도를 했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며 사랑했고 김치선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너무 많이 쏟아 받았다. 김치선 목사님은 무엇보다 회개를 강조하시면서 설교 시간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했고, 가정을 다스리는 파수꾼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도 회개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사참배의 경력을 인정하며 그 죄의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다. “나는 부모에게 불효 막대한 죄인인데,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불효의 죄는 태산보다 더하리라. 나는 고멜이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너무 귀중한 회개의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했다.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 때 교인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28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다. 28천 여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다.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설교를 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양공고를 다니던 안흥규라는 학생을 우연히 만났다. 함께 전도하고 함께 예배 드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어서 주일날 들판에서 예배 드리기가 불편했다. 근처에 있는 학교의 교실 서너 개를 빌려서 학생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실 고 3때는 공부에 전념하여야 하는데 나는 고 3때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합격하여 역사를 전공하며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다. “한양제일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달았다.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다.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교회였다.

그런데 어떤 젊은 엄마 교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한양제일 교회가 제일 좋아요.” 내가 주일 오후 대학생 교복을 입고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어떤 교인이 보고는 천사가 전도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도 했다.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랑과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눈물의 회개와 은혜사모와 기도와 전도의 목사님을 나의 신앙의 스승님으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듣는 귀와 순종할 수 있는 몸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때 나와 같이 사역하던 안흥규 학생은 나중에 내가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할 때 함께 사역을 했고 강변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 한경직 목사의 생전 모습     ©월드비전 제공

 

 

넷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한경직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그리고 협력과 화평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다. 내가 1살 난 애기 때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한경직 목사님이 나를 안아주시곤 했는데 내가 한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와 도움과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 내가 11살 때 평양에서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난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이셨고 사랑과 은혜와 도움을 받은 분도 한경직 목사님이셨다.

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와 대창교회를 다녔지만 수요일 저녁예배를 자주 영락교회에 가서 한경직 목사님의 시편 강해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즉 나의목자시니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한평생 살 수 있다고 말씀해서 나는 그렇게 고백하기로 작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탄절마다 영락교회에서 공연하는 헨델의 메시야 찬양을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곤 했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란 가사에 즉 멸시를 받아 싫어 버림을 당하시고”: 라는 가사에 충격과 감동을 받기도 했다.

내가 서울고등학교 3학년 학생일 때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가서 앞으로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기 전에 대학교에 가서 무엇을 전공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역사를 전공하면 좋겠다고 말씀해서 결국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해서 서양사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총신에서 공부한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에도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가서 추천서를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12년 동안 유학 후 귀국 후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보다 가까이 지내면서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와 도움과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의 목사님이셨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온유와 겸손과 부드러움의 목사님이셨다. 내가 무례한 부탁을 드린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온유하고 부드럽게 들어주시곤 했다. 내가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주일성수 운동을 전개할 때 한경직 목사님에게 명동거리에 나오셔서 주일성수 운동에 동참하는 서명을 받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꺼이 명동 거리에 나오셔서 의자에 앉으셔서 지나가는 행인들로부터 주일성수 운동에 동참하는 서명을 받으시기도 했다.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또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주관하는 서울 케직 사경회가 1885년부터 2001년까지 8번 개최되었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세 번 강사로 오셔서 세 번 설교를 해 주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19852월 할렐루야 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서울 케직 사경회에 오셔서 조지 던칸, 박윤선, 이상근 목사님들과 함께 설교를 해 주셨고, 19872월 사랑의 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서울 케직 사경회에 오셔서 조지 던칸, 사도시 모리야마, 박윤선, 목사님들과 함께 설교를 해 주셨고, 19882월 전북 내장산 관광호텔에서 개최된 제4회 케직 사경회에 오셔서 제임스 보이스, 박윤선, 박종렬 목사님들과 함께 설교를 해 주셨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한경직 목사님은 맨날 울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린 눈물의 목사님이셨다. 자기 죄와 민족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시면서 맨날 우셨다. 1960710일에 행한 여호와의 손이란 제목의 설교 초두에서 이런 고백을 하셨다. “누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에는 오직 자기는 죄 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라는 회개의 고백을 하시기도 했다. 그때 옥한흠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목사님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은 1992년 템플턴상 수상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라고 인사말을 할 때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또한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두를 받으시고 모두를 사랑하신 긍휼과 포용과 사랑의 목사님이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1936년 신의주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아보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1939년 신의주에 보린원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을 돌아보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194510월 월남 후 12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 전도교회를 설립하고 피난민들에게 거처할 숙소와 양식을 마련해주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1950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국군을 위문하는 일은 물론 부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어린 인민군도 돌아보셨다. 결국 한국을 돕고자 부산에 와있던 밥 피얼스 박사와 함께 월드 비젼을 창설하게 하는 일도 하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다. 그리고 19901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다. 그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입술과 손 발을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쓸 수 있게 힘을 준 은총에 감사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원수도 없었고 분노도 없었다. 독재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고 자기에게 해를 끼친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마지막까지 남한산성에서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시다가 가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또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모두와 협력하시면서 모두와 화평을 추구하신 협력과 화평의 목사님이셨다.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의 첫째 특징을 화평의 목회라고 지적했고 이종성 박사는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의 특징 세 가지 중의 하나가 협력의 목회라고 지적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영락교회의 목회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목회에 있어서도 화평과 협력과 연합을 추구해 나가셨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와 통일을 추구하셨다. 즉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폭 넓게 펴 나아갔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손을 잡고 모두를 협력하며 격려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님도 신현균 목사님도 김준곤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께 대한 감사를 표하고 또 표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무엇보다 물욕을 내어 던진 삶이 깨끗한 가난과 청빈의 목사님이셨다. 그분에게는 자동차도 집도 통장도 재산도 옷도 아무 것도 없는 345무의 삶을 사셨다. 은퇴 후 남한산성의 15평 되는 아주 작은 집에서 26년 동안 너무너무 소박한 삶을 사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의 남한산성 거처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너무너무 깊은 충격을 받곤 했다. 나는 강변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들과 권사들과 집사들과 청년들과 신학교 제자들과 외국에서 온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모시고 남한산성을 자주 방문하곤 했는데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깊은 감동을 받곤 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후에도 여러분들을 모시고 남한산성을 방문하곤 했는데, 전국에서 온 작은 교회 목회자들 백 여명을 모시고 남한산성을 방문했을 때 가난과 고난 중에서 목회하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깊은 충격을 받고 놀라면서 감격하는 것을 눈으로 보기도 했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곤 했다. 내가 남한산성으로 한경직 목사님을 자주 찾아 뵙곤 했는데 찾아 뵐 때마다 한경직 목사님은 내 손을 붙잡고 아버지,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순교하신 나의 아버지를 부르시곤 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언제나 좋아, 좋아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마지막까지 한경직 목사님을 돌아보시던 백운경 장로님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 오면 제일 좋아하시지요.” 너무너무 고맙고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었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 눈물과 참회, 긍휼과 사랑 그리고 협력과 화평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 영음사와 정암문서선교회 주최로 열린 '박윤선 중국어 주석 및 대담집 출판기념회'     ©뉴스파워

다섯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총신과 합신에서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는데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말씀,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다.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들 중의 한 분이 되셨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힌 분이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도 박윤선 목사님을 흉내 내며 두 달 동안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박 목사님 가까이에서 기도하곤 했다. 박윤선 목사님은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다.

박윤선 목사님은 1979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기도로 일관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윤선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서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합신에서 교수하실 때도 기도로 일관했다. 교수 세미나를 주로 기도원에 가서 하시곤 했다. 일부 교수들은 싫어했지만.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이냐?” 라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셨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었다. “내가 주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를 떠나서 우정으로 주를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한 평생 기도와 함께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사신 분이셨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평생을 신 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치셨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치셨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도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들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는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라고 토를 달곤 한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시지 않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으셨다. 따라서 그 분의 설교에는 언제나 가슴과 영혼을 움직이는 성령의 감동이 넘치고 있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인격으로 나타났다. 박윤선 목사님은 가식과 꾸밈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과 미소를 지닌 분이셨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또한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기도와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합동측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하게 지내셨다.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시면서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매우 만족해 하셨다.

내가 총신
1학년 학생일 때 고 박형룡 박사님은 그때 여의도에서 개최되고 있던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 가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19837월 암스텔담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국제전도대회에 나와 함께 참석해서 은혜를 사모하면서 설교 말씀을 경청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폭이 아주 넓은 분이셨다

.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셨다. 여성인 이동주 교수가 합신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윤선 목사님은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특별한 믿음과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신 분이셨다. 나에게 자주자주 전화를 거시곤 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지만 주로 자신이 가슴에 지니고 있는 안타까운 생각들을 나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나에게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박윤선 목사님 자신이 생각하는 교단과 신학교와 교수들의 삶이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나에게 토로하시는 말씀들이었다. 말씀들 중에는 교수들이 보다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데, 강의 준비에 철저해야 하는데, 목회와 선교에 적극적이야 하는데, 타 교단에 대해 포용적이어야 하는데, 여성 목회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는데등등이었다.

나는 교수회를 할 때 일부 교수들이 박윤선 목사님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표명할 때 박 목사님이 이렇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라고 말하면 박윤선 목사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했냐고 말씀하시면서도 본인의 안타까운 생각을 계속해서 자주 나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는 또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다
.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소통이 잘 되던 분이셨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박윤선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와 소통을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며 박윤선 목사님의 진솔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부족한 저를 너무 사랑하시고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신 이야기 한 마디를 더 한다. 내가 섬기고 있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제일 앞자리에 앉으시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의 수 제자이신 장경재 목사님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앞 자리에 앉으시곤 했다. 또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주관하는 서울 케직 사경회가 1885년부터 2001년까지 8번 개최되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 네 번 강사로 오셔서 네 번 설교를 해 주셨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박윤선 목사님께서 기도로 일관하신 기간이었다.

내가 평생 처음으로 신학교와 교회에서 안식년을 얻어 1988년 여름 8개월 동안 미국 휫튼 대학에 가서 연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박윤선 목사님께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서울에 전화를 했다. 사모님이 박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중얼거리고 그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달려왔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던 박윤선 목사님을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라고 고백하시기도 했다.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일이 기도해 주시셨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라고 호소하시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박 목사님의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아주 많이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보통 반가워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손 박사 보고 싶어, 오라고 해그래서 손 박사에게 전화를 걸고 빨리 오라고 하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그 길로 공항으로 달려가서 미국으로 갔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기도와 말씀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셨고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몸에 지니고 사신 분이셨다. 나는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서 사신 그리고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몸에 지니고 사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

 

▲ 섬기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정진경 목사(기성 증경총회장).     ©뉴스파워

여섯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정진경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에게 베푸신 많은 은혜 중 하나는 온유, 겸손, 포용, 격려, 칭찬의 삶이 무엇인지를 나에게 삶으로 보여주신 정진경 목사님을 나의 아주 가까운 아주 친밀한 스승으로 주신 것이다.

첫째, 나는 1980년 전후부터 정진경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알게 되었는데 30여 년 동안 친밀하게 사귀면서 정진경 목사님의 사랑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계속했다. 1981317일 아세아 연합신학원에서 박조준, 한철하, 정진경 목사님 등 몇 분이 함께 모여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정식으로 조직하고 강화하기로 하고, 198157일 아신원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창립 총회를 열고 회칙을 통과시킨 후 초대 회장에 박조준 목사님을 부회장에 김준곤, 한철하, 정진경, 나원용 목사님을 선출했는데 그 때부터 나는 정진경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 안에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며 바른 신앙운동을 펴 나아가는 일을 함께 했다. 19841022일 신촌성결교회에서 모인 제2차 총회에서는 정진경 목사님이 회장으로 김명혁 목사가 총무로 선출되어서 우리 두 사람은 한복협을 중심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계속했다.

둘째, 정진경 목사님은 함께 다니기에 너무 편한 분이셨고 소박하시고 따뜻하신 분이셨다. 나는 30여 년 동안 정진경 목사님과 한복협과 아시아 복음주의협의회와 소련선교회 등의 일로 아시아와 세계 곳곳을 수 없이 많이 함께 다녔는데 정 목사님은 함께 다니기에 너무 편한 분이셨고 소박하시고 따뜻하시고 친절하신 분이셨다. 때로는 우리 집사람이 다른 여성과 룸메이트를 했고 내가 정 목사님과 룸메이트를 했다. 정진경 목사님은 무엇을 강하게 주장하시는 분도 강요하시는 분도 아니셨다. 모든 환경에 잘 적응하시는 편안한 분이셨다.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와 세계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분이셨고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신 분이셨고 바른 신앙을 펴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신 분이셨다. 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교회의 지도자 죠수아쯔타다 목사님은 정진경 목사님의 안부를 물으면서 정 목사님께서 일본 교회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정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전했을 때 쯔타다목사님은 너무 아쉬워했다. 정진경 목사님은 아시아 교회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분이시기도 했다.

셋째,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가 힘써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늘 바른 말씀을 하셨다. 정진경 목사님께서 1985311일 노량진교회에서 주일 성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주제를 가지고 모인 한복협 월례조찬 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할 두가지 생활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의 1/7을 바치는 주일성수이고 또 하나는 물질의 1/10을 바치는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에서 하루를 성별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안식의 축복이 됩니다. 주일 하루를 온전히 성별 하여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은 물론, 나 개인과 사회에 축복이라는 주일성수의 근본정신을 철두철미하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1991610일 연희장로교회에서 설교 구성법이란 주제를 가지고 모인 한복협 월례조찬 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작금의 강단을 보노라면 세상 따라 가는 모습을 보는데 강단이 꼭 무대같이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설교보다는 조용히 스며들게 하는 설교가 올바른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북한 동포 돕는 일에 대해서 폭 넓은 입장을 지니셨고 타 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서도 폭 넓은 입장을 지니셨다. 정진경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군인들이 먹으면 어떻습니까? 그들도 우리 동족이 아닙니까?” 200935개 종교의 지도자들이 “31 운동 90주년을 맞으며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경동교회에서 함께 모인 한복협 월례 모임도 전적으로 후원하셨다. 방지일 목사님이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기도를 최희범, 박경조, 김상복 목사가 드렸고, 이응준 원불교 교무가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노래한 후, 개신교의 입장에서 이만열 교수가, 천도교의 입장에서 임형진 교수가, 불교의 입장에서 법륜 스님이, 천주교의 입장에서 김홍진 신부가 각각 주제 발표를 했고, 김대선 원불교 교무와 손봉호 교수가 응답을 했고,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서 애국가와,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한 후, 정진경 목사님이 축도를 했는데 참석자 300여 명이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고 방지일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은 그 모임이 너무너무 좋았다고 말씀했다.

다섯째,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이 목회하던 강변교회를 사랑하시며 자주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곤 했다. 정 목사님은 199382-4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주제를 가지고 속리산에서 모인 강변가족 수련회에 오셔서 세 번 설교를 해주셨는데 모두 은혜를 받으면서 사랑과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11월에 가진 원로 목사 초청 주일 예배에 오셔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 동안 방지일, 정진경, 김준곤, 강원용, 림인식, 김창인, 조향록, 이종성, 김선도, 목사님 등이 오셔서 은혜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매년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2007년에 오셔서 마지막으로 전하신 바르게 사는 길이란 제목의 설교의 첫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오래 살다 보니까 남은 생애를 어떻게 정리를 할까 그런 생각이 2년 전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라도 바르게 살므로 매듭을 짓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이런 제목을 택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한 달 동안을 낮 예배 밤 예배를 원로들 중진목사들을 청해서 계속 설교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김목사님은 보수적인 신학자요 목회자로 알고 있지만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이분처럼 개방적인 분이 없습니다.”

여섯째,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격려하시는데 아낌이 없으셨다. 1999년 설날인 화요일 저녁에 KBS 방송이 내가 존경하는 이 사람이란 생방송 프로를 진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프로를 진행하는 동안 정진경 목사님께서 부족한 나를 지목하시면서 지나치게 칭찬하시고 지나치게 격려하셔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또한 내가 쓴 영 몰라 통 몰라 가르쳐줘도 몰라라는 책의 추천서를 쓰시면서 지나칠 정도로 과찬을 해주셨는데 추천의 글이 너무 길지만 너무 고맙기 때문에 그대로 다 인용한다.

내가 좋아하는 김 목사. 오래 살다 보면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가까운 친구도 갖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경험일 게다. 그러나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또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허용할 수 있는 친구를 갖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김 목사와 같은 신실한 친구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린다. 내가 김 목사와 가까이 사귀게 된 것은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 일에 관계하면서부터이다. 내가 회장이 되고 김 목사는 총무가 되어 복음주의 운동을 함께 하면서 나는 그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도 나를 믿어 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가까운 동반자가 되었다.

그 후 우리 두 사람은 외국 여행을 함께 하는 기회가 잦아졌다. 주로 아시아 복음주의 협의회,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 일로 홍콩, 싱가폴,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개최되는 국제 회의에 같이 참여하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일본, 소련, 중국 등 여러 지역을 함께 여행했다. 우리 두 사람은 외국에 갈 때마다 룸 메이트가 되어 사사로운 일로부터 한국 교회의 문제, 사회, 국가에 관한 일까지 폭 넓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주 안에서 정이 들고, 서로의 신학적인 입장이나 사상, 이념 같은 것도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목회와 선교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서로 상의하는 동역자가 되었다.

김 목사는 복음적인 신학자로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고 그의 학문적인 업적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신실한 목회자로서 강변교회를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 신앙과 덕으로 신자들을 훈련하고 보살펴 오늘의 성숙한 교회를 키웠다. 그가 오랜 세월 지불한 희생과 봉사의 대가는 훌륭한 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또한 그는 폭 넓은 문필가이다. 자신의 전공에 대한 저작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그는 문필력이 뛰어난 학자이다. 때로는 회의를 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내일 발표할 연설의 원고를 쓰기도 한다. 어떤 때는 방금 의논된 내용들을 문서로 정리하여 그 다음 시간에 언론 보도에 넘길 정도로 신속하게 붓을 놀린다.

그는 또한 선교 사업, 구호 사업에도 앞장서서 주도하는 교계의 지도자이다. 한 동안 아시아 지역에 홍수가 범람하고, 아프리카 지역에는 한재가 극심하여 식수가 끊겨 사람들이 병 들고 죽어 갈 때 발벗고 나서 동분서주하며 많은 성금을 모금하여 수십 개의 우물을 파 줌으로 식수난을 해결해 주었다. 요즘은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다. 그의 북한 동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을 나는 안다. 그가 신앙의 자유와 성수 주일을 위하여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월남하여 오늘까지 통일되기만을 바라는 그 일념으로 살아왔기에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쏟아 붓는 그의 애정과 정열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목사는 많은 시간과 정열을 바쳐 교파의 벽을 헐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분열된 한국 교회의 일치와 화합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내가 김목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그의 능력이나 받은 은사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가 맡은 일에 쏟아 붓는 정열을 좋아한다. 어떤 때는 일에 미친 사람같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미친 사람은 못할 일이 없다. 그는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지칠 줄 모르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지도자이다. 그에게서는 일의 욕심을 빼고는 아무런 사심도 욕심도 없다. 그저 일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 같다. 나는 김목사의 이런 점이 늘 부럽다.

또 내가 김목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이다. 몇 해 전에 그가 시무하는 강변교회 제직 수련회의 강사로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속리산에서 수련회를 마친 후 그 교회의 나이 드신 권사님 한 분이 자기 차로 나를 서울까지 태워다 주었다. 오는 도중에 그는 나에게 자기 교회 목사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김목사는 조그마한 자기 집을 가지고 사는데 교회가 그 집보다 좀더 넓은 집을 마련해 드리려고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주변에 이런 집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더 큰 집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권사님 말씀은 "우리 김목사님은 차도 작은 것, 집도 작은 것만 좋아하시니 그 정도밖에 못살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 말은 김목사의 청렴한 생활의 일부를 공개한 것이다.

내가 김목사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숨김없이 사는 그의 솔직한 성품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생각하며 그대로 산다. 그에게는 가식이나 꾸미는 것이 없다. 속과 겉이 같은, 요새 말로 하면 투명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강한 추진력 때문에 연합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치성이 강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에게 정치성 같은 것은 티끌만치도 없다. 다만 자기의 소신대로 밀고 나가다 보니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한다.

내가 김목사를 좋아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망각증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이 많아서 잊어버리는 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그는 어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 주변 정리에 소홀할 때가 많다. 여행을 같이 하다 보면 여권을 잃어버리고 이 대사관에서 저 대사관으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기가 가지고 온 소지품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리고 '내가 분명히 이런 옷을 가방에 넣었는데 이상하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당황하거나 염려하거나 안달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무관심의 사람인지 현세를 달관한 사람인지 분간이 안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할 일은 빈틈없이 다해 낸다. 나는 그의 그런 면모가 좋다. 그래서인지 강변교회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은 영 몰라 통 몰라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기 영 몰라 통 몰라라는 제목으로 김목사가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김목사가 쓴 글을 기쁨으로 추천한다. 19992월 정진경 목사나는 위와 같은 분에 넘치는 과찬의 글을 읽을 때마다 너무 부끄럽고 너무 황송한 마음을 지닌다. 앞으로 천국에서 정목사님을 바로 뵙기 위해서도 보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모두를 품고 사랑하는 포용과 긍휼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200993일 아침에 병원에 가셨다가 그날 밤에 별세하셨다. 나는 200993일 목요일 아침 정 목사님께 전화를 걸고 인사를 드렸다. “나 지금 병원에 와 있어. 기침이 나서 주사 맞으려고 병원에 왔어.” “빨리 나으셔서 청평에 놀러 가셔야지요.” “그래, 그래.” 사실 나는 정 목사님 등을 모시고 청평 별장에 자주 가서 놀곤 했다. 박종렬, 방지일, 최복규 목사님도 모두 모시고 가곤 했는데 모두 좋아하시곤 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전화를 한 후 나는 방지일 목사님께 전화를 걸고 오는 15일 청평으로 놀러 가자고 말씀했더니 좋아, 좋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정진경 목사님께서 밤 9시경 몸이 아파서 다시 병원에 가셨다가 1015분경 세상을 떠나셨다는 청천병력과도 같은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병원 빈소로 달려갔고 97일 월요일에는 신촌성결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도 달려가서 조사를 읽었고 그리고 벽제 화장터에도 오산 리메모리얼파크 납골당에도 달려갔다. 너무너무 허전하고 너무너무 아쉽고 슬펐다. 그러나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고마웠다. 너무너무 존경하고 사랑한다.

장례식에서 한 조사를 여기 그대로 옮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신촌성결교회와 한국교회를 너무 사랑하시고, 신촌성결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서 생명의 진액을 다 쏟아 부으셨지만, 부족하고 부족한 저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저는 온유 겸손하신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는 더 친밀한 사랑과 격려와 칭찬을 몽땅 받았습니다. 백두산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홍콩 등 세계의 수 많은 곳을 정 목사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저는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에 훌륭한 분들은 많지만 정 목사님과 같이 항상 가까이 친밀하게 사귈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저의 진정한 스승이시고 형님이시고 아버님이셨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림인식 목사님께서 입관 예배 설교에서 지적하신 대로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영성과 사명과 실천과 영광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사시면서 예수님의 흔적과 모습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또한 한경직 목사님처럼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격려와 칭찬의 삶이 무엇인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갈등과 분노와 분열이 가득한 한국교회에 포용과 연합과 일치가 무엇인지를 삶과 사역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여러 기관들을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사랑하시고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습니다. 어느 다른 기관들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신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적인 복음주의 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저희들 곁을 너무 갑자기 떠나셔서 저희들은 너무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지난 목요일 아침 전화를 걸고 인사를 드렸는데, “나 지금 병원에 있어 주사 맞으러 왔어라고 말씀하셔서 걱정은 했지만 그렇게도 빨리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주사 맞고 집에 돌아 오셨는데 밤에 다시 아파서 병원에 가셨다가 곧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은 우리들 곁을 너무 빨리 떠나셔서 너무 슬프고 너무 공허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하실 일을 다 하시고 많이 앓지 않으시고 평안하게 하늘 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조만간 천국에서 사랑하는 정 목사님을 반갑게 만나 뵙기를 바리며, 천국을 준비하는 참회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봉사와 연합과 일치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97일 월요일 아침 목사님의 사랑 받던 제자 김명혁 목사 드립니다.”

 

 

▲ "대제사장의 의무를 감당하는 우리가 되자." 방지일 목사     ©뉴스파워 자료사진

일곱째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방지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방지일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눈물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다. 나는 방지일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뵈면서 방지일 목사님께서 순수하고 섬세하고 정확하고 따뜻한 영적 통찰력을 지니신 분이시고 지치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달려가시면서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순수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는 분이심을 발견했다.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를 정확하게 진단하시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시는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명을 수행하신 귀중한 분이시라고 생각한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나에게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신 너무 고마운 분이셨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자주 자주 나에게 전화를 거시고 김 목사, 점심 대접할게라는 송구한 말씀을 수십 번 하셨고 제가 달려가면 일산으로 강화도로 경기도로 서울 곳곳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시곤 했다. 내가 식사비를 내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식당 주인이 절대로 받지 않았다. 목사님께서는 나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식사를 대접해주셨다. 목사님께서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선교사들에게 깊고 섬세한 관심을 가지고 매일 두 세 시간씩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으시면서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시곤 하셨다. 자동차를 타고 식당으로 갈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수십 년 전의 지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나 재미있게 나에게 해 주시곤 했다. 목사님의 기억력은 너무너무 놀라웠다. 길선주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비화들을 상세하게 해 주시곤 했다. 목사님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한 것은 201491012시 명월관에서였다. 그 때는 (몇 달 전에도 그랬지만) 저희가 식사를 대접해 드렸는데 그것이 목사님과 함께 한 마지막 식사였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계시는 생각들을 나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시곤 했다. 박윤선 목사님처럼 정진경 목사님처럼 말이다 김 목사, 나는 어제 아침 모임에서 어느 분이 회개 기도를 하면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문제들을 조목, 조목 고발하는 설교 같은 기도를 하는데 그게 죄 고발이지 회개야. 나는 아멘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 김 목사 아멘 했어” “길선주 목사님은 사경회 때마다 찬송가 177장을 부르면서 회개와 자복을 강조했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는 사경회는 없어지고 감성적인 면으로 치우칠 수 있는 부흥회만 남게 되었어요. 그때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무릎을 꿇고 애를 썼는데, 지금은 각종 프로그램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어요.” “전에는 주일 아침 예배나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문제야요. 그리고 주일 아침에 예배 보고 교인들이 헌금 낸 돈으로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보고 집으로 가니 참 문제야요. 우리 영등포교회도 오후 예배로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데, 방 목사 죽은 다음에 바꾸자고 해요, 나 참!”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인데 지금은 사람의 소리를 중계해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서 모든 더러운 것들을 녹여버려야 하고 그리고 채소가 햇빛을 받아야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주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모든 오관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상황이나 전략이나 계획 등을 바라보는 대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분쟁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야곱처럼 브니엘을 거쳐야 합니다. 즉 야곱처럼 병신이 되어야 합니다.” “삼합리교회에서 흘린 눈물의 바다를 본 후로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가 내 기도 제목이 되었어요.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나 혼자 있을 때면 우는 때가 많아요. 깊은 밤중에 일어나 우는 때도 있고 혼자 길을 걸으면서 우는 때도 적지 않아요. 어린 아이는 잘 울어요. 배가 고파도 울고, 보고 싶어도 울고, 기저귀가 젖어도 울어요. 어린 아이는 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해요. 우리는 어린 아이 한데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얼마나 귀중하고 보배로운 말씀들을 해 주셨는지 모른다. 너무나 귀중하고 보배로운 영적인 유산을 우리들에게 물려주셨는지 모른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나와 강변교회를 너무 사랑해주셔서 내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하기 전 6년 동안 매년 11월 어느 주일에 오셔서 너무나 귀중한 보배로운 말씀을 전해 주시곤 했다. 나는 원로 목사님들을 모시면서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부족한 목회 중 나와 강변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채워주는 일들 중의 하나는 매년 11월에 교계의 원로 목사님들을 초청하며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저녁 예배에는 현직 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는다. 지금까지 주일 아침에 초청한 원로 분들 중에는 매년 오시는 방지일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창인, 정진경, 강원용, 김준곤, 림인식, 조향록, 홍순우 목사님 등이 계신다. 교파와 배경이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정제된 보석 같은 말씀들을 들으면서 강변교회 성도들은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원로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교회에서 드리는 소정의 사례와 함께 세 사람의 성도들이 자원해서 준비한 세 가지 선물도 드린다. 선물을 드리는 성도들이나 선물을 받는 원로 분들은 모두 즐거워한다.”(“나의 목회와 원로 초청예배목회자 신문 2005.1.29.).

나는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모스크바로, 중남미 도미니카로, 몽골로, 태국으로 다니면서 선교대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은 물론 나는 너무너무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다. 2003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구소련 선교사대회에 참석한 소감의 일부를 적어본다. “황혼을 아름답게라는 제목으로 내가 쓴 글이 기독교보 시론(03.7.19)에 실렸었다.

인생에게는 황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생의 황혼을 불안과 두려움과 추함을 지니고 마감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황혼을 평안과 여유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마감한다. 나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구소련 선교사대회에 강사로 참석하신 94세 고령의 방지일 목사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분은 인생의 황혼을 아름답게 맞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 방지일 목사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에 충실한 분이다. 방지일 목사님은 선교대회의 모든 일정에 충실하게 참석했는데 새벽기도회 시간부터 늦은 밤 선교사 보고의 시간까지 한 시간도 거르지 않고 충실하게 참석했다. 휴식 시간에 잠깐 밖에 나가 있다가 일정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분이 시간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계시는 것 자체가 젊은 후배 선교사들에게 감동과 격려가 되었다. 그분은 자기에게 주어진 평생의 시간과 환경에 최선을 다하며 충실한 삶을 사신 분이시다. 둘째, 방지일 목사님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다. 방지일 목사님은 이번 선교사대회 때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간증적인 말씀을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말이 길어지기가 쉽고 산만해지기가 쉽다. 방지일 목사님은 한 평생을 간결하고 간소하면서도 굵고 핵심적으로 사신 분이다. 셋째, 방지일 목사님은 소박하고 겸손하고 따듯하게 사시는 분이시다. 방지일 목사님은 이번 선교사대회 때도 소박하고 겸손하고 따뜻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보였다. 최고의 예우를 받으셔도 될 분인데 러시아 비행기 3등 칸을 타고 오가셨고 수양관의 소박한 방에 유하셨다. 나는 어느 날 밤엔 난방이 되지 않은 방이 너무 추워서 자다가 일어나 바지와 긴 팔 셔츠를 입고 자기도 했다. 그러나 방 목사님은 조금도 불편해 하시지 않았고 항상 유쾌했다. 강사 한 분은 설교를 하곤 곧 사라지곤 했는데 그곳 선교사들이 모스크바에서 제일 비싼 호텔에 갔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을 들었다. 방 목사님은 후배 선교사들을 항상 겸손하고 따듯하게 대하셨고 아들 같은 나를 따뜻하게 대하시며 황송할 정도의 칭찬의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인생의 황혼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욕심을 버리면 그렇게 될 것 같다. 선교의 정신과 순교의 정신을 몸에 지니면 우리의 황혼이 보다 아름다워 질지 모른다. 돈과 자리와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 우리의 황혼도 아름다워질지 모른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고 검소하고 겸손하고 따듯하고 충실하고 간결하게 살도록 힘을 써야 하겠다.”

그 다음200510월 도미니카에서 열린 선교사대회에 참석한 소감의 일부를 적어본다. “기도하며 전도하고 사랑하며 선교하자”(도미니카 선교대회 보고) 라는 제목으로 내가 쓴 글의 처음 두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소개한다. “이번 도미니카 선교대회는 은혜와 감동이 충만한 너무나 좋은 선교대회였다. 중남미의 조그만 섬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싼타도밍고에 한국과 미국과 중남미 곳곳에서 80여명의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발표하면서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함께 나누며 함께 모색했다. 이번 선교대회의 하이라이트들을 소개하며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고 한다.”“첫째, 한국교회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96세의 방지일 목사님께서 아침 기도회 메시지를 전하셨는데 이번 선교대회에서 선포된 메시지 중 가장 감명 깊은 은혜와 영감이 충만한 메시지였다. 확신에 넘치는 쟁쟁한 목소리와 놀라운 기억력과 에스겔39:8 한절 말씀에 대한 깊고 폭 넓은 강해 설교에 참석자들은 모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볼찌어다.’우리 존재의 모든 오관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우리 자신이나 상황이나 전략이나 계획 등을 바라보는 대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 일이 이르고 이루리니.’인류 구원의 일과 선교의 일이 이르고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 일이 에스겔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르고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과 사도들과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르고 이루어 진다는 말씀이다. ‘그 날이 이 날이니라.’그 구원의 날은 과거에 이루어지고 미래에 이루어질 날이지만 항상 우리에게 있어서는 현재에 이루어지는 이 날이라는 말씀이다. ‘그 날이 이날이니라.’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날에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96세의 노구를 이끌고 도미니카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다음 달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가서 또 말씀을 전하실 예정이라는 말씀에 아들과 손자들 같은 참석자들은 모두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둘째, 선교 2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지도자 몇 분들의 선교 지향적 삶과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참석자들은 모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최복규 목사님은 전도사 시절부터 최근에 은퇴하시기까지 평생의 목회 사역과 부흥 사역을 선교 지향적으로 해 오셨다고 간증했다. 산돌중앙교회의 신동우 목사님 역시 극히 가난한 지역에서 25년 전에 목회를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선교 지향적 목회를 해 오고 있다고 간증했다. 미국의 이원상, 박희민, 호성기 목사와 토론토의 임현수 목사님도 선교 지향적 목회에 대한 간증을 했는데 모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다섯째, 수요일 밤의 모임은 뜻 깊은 감동적인 모임이었다. 선교의 제 3세대인 유병국 선교사의 뜨겁고 생동적인 선교 도전에 이어 선교 제 2 세대인 최복규 목사님의 선교 일념의 평생 사역에 대한 간증이 있었는데 감동과 은혜가 충만했고 참석자들은 모두 선교에 일념 하여야 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다. 최복규 목사님의 말씀이 끝난 후 최복규 목사, 최일식 목사, 김명혁 목사, 강승삼 목사는 선교 제 1세대인 방지일 목사님 앞으로 다가가서 마루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며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했는데 우리는 물론 참석자들은 모두 깊은 감동에 사로 잡혔다. 폐회 기도를 저보고 하라고 해서 강대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왼편에는 최복규 목사님, 오른편에는 최일식 목사님이 서 계셨는데, 저는 감동의 울음이 북 바쳐 올라와 도저히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저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 갖는 경험이었다. 소리 내어 울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께,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순교의 피를 흘리신 신앙의 선배님들께, 수고의 눈물과 땀을 흘리신 신앙의 선배님들께, 그리고 선교의 현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동역자들과 후배 선교사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감사의 기도를 눈물로 드렸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과 저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리고 축도로 밤 집회를 마쳤다.”

그 다음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200612월 태국선교50주년기념에 가서 거기 모인 선교사들에게 귀중한 권면과 격려의 말씀을 2시간동안 계속해서 전해주셨는데 모두 깊은 감동과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20125월 몽골에 가서 현지 몽골 목회자들에게 권면과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셔서 모두 전무후무한 깊은 감동과 큰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내가 방지일 목사님과 함께 다니면서 받은 감동과 은혜의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없다. 저희 두 손자들도 방 목사님의 깊은 사랑을 받고 늘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귀한 선물을 받기는 처음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시면서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는데 몸에 병이 드신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얼마동안 몸이 좀 불편하셨지만, 그렇게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실 줄은 정말 몰랐다. 바로 20141010일 금요일 아침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 모임을 하고 있는데, 김승욱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울려 왔다. 몇 시간 전인 새벽 020분경에 방지일 목사님께서 운명하셨다는 너무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셨다.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다. 한국교회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님들께서 모두 우리 곁을 떠나시고 한 분이 남아계셨는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나?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한복협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한복협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에게 방지일 목사님께서 갑자기 소천 하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제가 기도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나님 아버지, 104세까지 장수하게 하시다가 마지막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사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몸과 영혼과 자녀들과 후손들을 위로하시고 복 주시고 천국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겨서 하나님 품에 안겨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천국 가서도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방 목사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장례식과 모든 예식을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우리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계기가 되도록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모두 방지일 목사님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사모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함께 기도드렸다. 한복협 모임을 마치자마자 CTS 기자와 21TV 기자가 추모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해서 추모의 말씀을 녹화했다.

나는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방 목사님의 시신이 안치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목사님의 영정 앞에서 머리 숙여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드리면서 방지일 목사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모하게 되었다. 방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있으면서 정성껏 받들어 섬기시던 김승욱 목사님과 유족 몇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과 위로의 인사를 드렸다. 방 목사님께서 이 삼일 동안 몸이 불편하시다가 병원에 가신지 6시간 후에 운명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몸이 모두 다 닳도록 마지막까지 일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도 들었다. 주선애 교수님이 와 계셨고, 곧 이어서 조용기 목사님, 이영훈 목사님, 임석순 목사님이 조문하러 오셨다. CGN TVC 채널 기자들이 또 나에게 추모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해서 추모의 말씀을 녹화했다. 병원을 떠나려고 하는데 내가 보낸 조화가 도착해서 목사님 영정 앞에 놓게 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보낸 조화이다.

이제는 방지일 목사님을 몸으로 만나 뵙지도 사랑과 가르침을 받지도 못하게 되어서 너무너무 슬프고 안타깝다. 하늘에서도 주기철 목사님처럼 못난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 조만간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힘입어 하늘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방지일 목사님을 반갑게 만나 뵙고 그래서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되기를 기다린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고맙고 감사한, 보고 싶고 뵙고 싶은 방지일 목사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오늘 14일 오전 한국교회장으로 집행하는 추모 장례예배에 와서 3분간 추모사를 하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지금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와 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서 너무너무 죄송하고 아쉽습니다. 20141014일 화요일 아침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김명혁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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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5 [15:4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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