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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2 [05:14]
피카소, 주변을 황폐하게 한 사람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로마 교회사 이야기
 
한평우

 

오래전 일이다.

미술을 전공하는 자매를 심방했다.

예배를 드린 후 자매가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간 사이, 벽에 걸린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림은 초등학생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림을 보고 속으로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 피카소 생가 앞에서 한평우 목사     © 뉴스파워 한평우

 

 

유학을 온지 수년이 지났는데 이런 정도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 하단에 싸인 이 있는데 Picaso(1881-1973)이었다. 그 싸인 을 보니 그림이 멋스럽고 격조가 있어 보였다. 이런 것이 인간의 얄팍함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불란서에 유학 후 미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분이 이제야 그림이 조금 보인다고 하니 나 같은 문외한이 저런 대가의 그림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작년에 평소 가깝게 지내는 영국의 L 목사님이 스페인에 함께 가자고 하여 한 주간을 지낸 일이 있다. 그는 콘도 회원이었기에 구라파에 있는 여러 곳의 숙소를 매년 청소비 정도만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간 곳이 바로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의 말라가(Malaga)이었다.

인구가 56만이 거주하는 해안가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에 20세기의 유명한 화가 피카소를 밀도 있게 관찰 할 수 있어 좋은 기회다 싶었다. 나의 관심은 피카소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뮤즈 엄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생전에 고난을 벗 삼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의 천재성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대중들의 몰이 해 때문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예술가에게는 몹시 고통스런 일이었을 게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돈을 벌 수 없음을 의미하고, 돈이 없다는 것은 삶의 고통스러움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고흐는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는지 모른다
.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컸을 까 싶다. 그는 돈이 없어 결혼할 꿈도 꾸지 못했고 카페를 마시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스케치를 그려주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 피카소 미술관 앞에서 한평우 목사와 사모     ©뉴스파워 한평우

피카소는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는데 아주 뛰어난 실력을 보여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16살에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2년 만에 자퇴를 하고 미술 활동을 했다.

박물관에는 그가 어렸을 때 다녔던 학교의 학적부가 남아있었다.

그의 일생이 그림으로 요약되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그림들-- 인생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가슴 서늘하게 조명 받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싶다.

 

그는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았다.

세계 1,2차 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비참한 참상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보통 사람이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을 말이다.

그런 상황들이 그의 그림들에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대중들의 인정을 받은, 예술가로서는 아주 드믄 경우를 산 사람이다. 나는 그의 그림을 평가할 수 있는 실력이 없으니 다만 그의 성공 뒤에 가려진 삶을 나는 조명해보고 싶었다.

성공한 예술가가 그 예술을 통해 과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라는 점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의 가정생활은 어떠했을 까?

크게 성공한 사람, 누구보다 유명한 삶을 살아간 사람, 어떤 예술가 보다 부요함을 누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피카소, 그는 평생 여러 명의 여인들과 동거 내지 결혼을 했다.

사람은 어떤 면이 위대하면 다른 면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시저가 로마의 여인들을 모두 자신의 아내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영웅담 때문에 여성 편력은 낭만적 일탈 정도로 역사가들은 가볍게 취급하는 것도 비슷한 유가 아닐까 싶다.

 

피카소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는 모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er1881-1966)이었다. 그녀는 유부녀로 피카소와 동갑이었다.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즐겁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람기 많은 피카소는
30세에 가냘프게 생긴 에바 구엘(Eva Gouel1885-1915)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올리비에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1915년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

그녀의 죽음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피카소를 비난했는데, 평소 허약한 마르셀을 피카소가 혹독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병들자 혹 전염될까봐 혼자 이사를 가기도 했다.

마치도 유명한 지휘자 바렌보임이 아내인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가 28살에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연주 활동을 접고 침대에 누어지내야 할 때 한 번 도 아내를 찾아보지 않았다는 몰인정의 대가처럼.

인간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의 음악이 어떻게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까 싶다. 그것은 명백한 사기행각이 아닐 까?

 

세 번째 여인은 러시아 발레단의 단원이었던 올가 고글로바(Olga Kokhlova1891-1955)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피카소와의 사이에 첫 아들을 낳았고 곧 버림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열일곱 살 된 마리테레즈 발터(Marie Therese Valter 1909-1977)에게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가 28살이나 났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6개월 동안이나 쫓아다닌 끝에 아내로 삼을 수 있었다.

자신의 창작 활동을 위해서일까?

평론가들은 아내를 새롭게 얻을 때마다 작품이 달라졌다고 언급하지만

.

그렇다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여인들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칸트는 사람은 목적이지 수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피카소는 그녀가 22살 때 딸 마리를 낳자마자 몰래 사진작가인 앙리에트 마르코비치를 만났고 곧 동거에 들어갔다.

 

그 후 친구의 소개로 만난 화가요,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Dora Maar1907-1997)을 만났고, 또한 40살이나 아래인 프랑수아즈 질로(Francoise Gilot1921-)에게 추파를 던졌다. 피카소가 62세 때요, 그녀는 22살이었다.

두 사람은 곧 동거에 들어갔고 곧 남매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들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여기자 주느비에브를 사랑하게 되었. 당시 그녀는 17살이었다. 이 사실을 안 프랑스와즈 질로는 남편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항상 여인들이 버림을 당했지만 이 번 만큼은 피카소가 버림을 당해야 했다. 그녀는 법대 출신이었기에 모든 것을 확실하게 했다.

소송을 통해 남매를 피카소의 호적에 올렸고 피카소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피카소의 여인에 대한 행각은 끝나지 않았다.

70살이 넘은 피카소는 40살이나 어린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1927-1986)를 만났다. 그녀는 언제나 피카소에 헌신적이고도 절대적은 사랑을 바쳤다고 한다. 그녀의 결혼 이유는 고상하지만 내용은 명성과 돈이 아니었을 까 싶.

피카소는 드디어 1973년에 세상을 떠났고 여인행각은 끝을 보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와 관계했던 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그의 곁으로 가겠다고 목을 매달았고, 도라는 정신 착란증을 앓다가 자살했다.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피카소의 무담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낳은 아들은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불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피카소는 주변의 여인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두 불행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데 어떤 사람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도 그의 예술이 위대하다고 침 흘리며 칭찬한다.



1932
년 칼 구스타프 융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분열증 환자의 심리를 보았다고 밝혔다. 분열증 환자들은 파편화와 분절된 선으로 대표되는 피카소의 큐비즘이 점점 더 비타협적이고 야만적인 색들을 통해 극대화 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림을 열망(?)하는 것은 비정상이 아닐까?

 

피카소가 남긴 작품은 회화 1885, 조각 1228, 도자기 2280, 스케취 4659, 3만점에 달하는 판화다.

아마도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들이나 평론가들이 상정한 가격에 불과하지 싶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화가의 그림을 가까이 하겠다 싶다.

이웃을 살리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린 생명 있는 그림을 말이다.

 

피카소의 손녀요, 파블로의 딸은 이렇게 절규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절망에 빠뜨릴 권리가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있는가? 그들의 작품이 제 아무리 찬란할지언정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킬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놓은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 가는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나의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의 피, 나의 피.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기며 피카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의 피.

그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황폐하게 만들었고 캄캄함으로 인도한 예술가였다.

사람을 살리는 화가가 아니라 죽음으로 이끈 사람,

그 이름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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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04 [22:0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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