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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1.22 [07:09]
“이준 열사는 병사 아닌 자결하셨다”
이준 열사 유족 대표 조근송 선생, 病死 주장 반박
 
김철영

이준열사의 유족 대표 조근송 선생은 "이준 열사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자결하셨다."고 주장했다

. 조근송 선생은 이준 열사의 큰 따님(이송선)의 외손자다. 남한에는 친손자가 없다고 밝혔다.

   
조 선생은 20일 자신의 SNS에 이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 1914년 7월 19일 자 1면 논설 '리쥰공이 피흘린 날' 부분     © 뉴스파워

 

그는 헤이그 밀사 이준의 죽음이라는 돌발 사태에 당황한 일본이 병사설()을 급조해서 퍼뜨린 탓에, 병사의 원인으로 단독설, 등창설, 심장마비설 등 여러 풍문이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다수의 사람이 제각기 거짓말을 하다 보니 사인이 일치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은 1907년이 채 가기도 전인 1220일에 한국정미정변사라는 책을 서울의 일한서방에서 발행하는데, 바로 이 책에서 병사설을 본격적으로 선전했다는 것이라며 조선일 의 기사를 소개했다.

 

조 선생은 이준 열사의 자결 근거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며 밀사들의 활동을 소상히 보도하던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티드(Stead)190793일 게재된 글에서 한국인들에게 진정 독립을 되찾고자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국력을 기르라고 충고한 내용을 제시했다.

 

또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191255일부터 발간 된 권업신문은 주필이 신채호 이상설(헤이그밀사) 이었다. 1912816일자 더운피를 뿌린 이준’, 1914719일자 이쥰공이 피 흘린 날이란 논설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1927년 일본의 공문서에서도 이준이 할복분사 했다고 적고 있다.”를 관련 문사를 제시하는 한편 다른 증거로는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1907715일 오후 2시쯤 이상설로부터 남편이 자결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국내 한 신문의 19591123일자 보도도 있다.”고 밝혔다.

▲ 1963년 당시 이준 열사 유족-국가기록원 소장 사진으로 조근송 명예회장 제공     © 뉴스파워

 

조 선생은 “1962년 공훈심사 때 자결이냐 병사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병사로 의견이 모아 질 때 민족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사실대로 기록하라고 했던 모양이라며 당시 공훈 심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했다. 국사편찬위원장이 이병도 못지않은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만든 조선사편수회 출신인 신석호였다. 당연히 일본 측 눈치도 보아야겠기에 할복분사에서 할복을 제외한 분사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인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 선생은 뉴스파워가 지난 79일 헤이그 이준기념교회 최영묵 담임목사의 말을 인용해 이준 열사가 병사했다는 기사를 올린 후 뉴스파워로 전화를 걸어와서 병사가 아닌 자결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조 선생은 20일 오후 뉴스파워로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SNS에 이준 열사의 자결의 근거를 게재했다고 알려왔다.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기념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최영묵 목사는 지난 7월 뉴스파워에 이준 열사는 숙소에서 병사하셨다.”일본의 독살설도 있지만, 얼굴에 종기가 생긴 의료 기록이 있고 이후 이위종이 잠시 러시아를 방문하는 사이 714일 호텔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이준이 돌아가시고 9월이 지나 장례식이 열렸는데,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와 루즈벨트를 방문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한 윤병구 목사가 미국에서 장례식에 참석했고, 당시 YMCA 네덜란드 총재가 조사를 하고 찬송을 불렀다는 현지 언론의 기사가 있다.”고 밝혔다.

 

최 목사는 자결했다는 보도는 국내에서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언론에서 과장 보도한 것이라며 이미 1963년에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기관에서 사실이 아닌 왜곡된 역사로 결론 내렸다고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글 전문.

 

이준 열사 자결 근거

 

헤이그 밀사 이준의 죽음이라는 돌발 사태에 당황한 일본이 병사설()을 급조해서 퍼뜨린 탓에, 병사의 원인으로 단독설, 등창설, 심장마비설 등 여러 풍문이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 다수의 사람이 제각기 거짓말을 하다 보니 사인이 일치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은 1907년이 채 가기도 전인 1220일에 한국정미정변사라는 책을 서울의 일한서방에서 발행하는데, 바로 이 책에서 병사설을 본격적으로 선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헤이그 밀사로 갔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술잔 부어놓고 울어 주려나

바람 눈 서리도 언 자리에서 내사 죽은 뒤에

누구라 장차 좋은 술 가져다가 청산에서 울어 주려나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에 이준열사가 지인들에게 준 시()는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결 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고 있다.

 

이준과 이상설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기 전날인 520, 한인 동포들은 이들을 위한 전별연을 열고 모금한 돈을 전달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이준은 이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을 바람이 쓸쓸하고 물도 바뀌어 차가운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秋風蕭蕭兮 易水寒, 壯士一去兮 不復還).” 이 시를 접한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는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기시감(旣視感)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준 열사가 지은 시가 아니라, 맨 앞의 ()’자만 빼면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떠나기 전에 지은 시였다. 따라서 물도 바뀌어란 부분의 기존 해석은 역수(易水)’라는 고유명사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칼을 지니고 헤이그로 떠난다는 얘기였을까? 그는 그 칼로 과연 누구를 찌르려 했던 것일까? ”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며 밀사들의 활동을 소상히 보도하던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티드(Stead)190793일 게재된 글에서 한국인들에게 진정 독립을 되찾고자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국력을 기르라고 충고한다. 는 과연 누구의 피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191255일부터 발간 된 권업신문은 주필이 신채호 이상설(헤이그밀사) 이었다.

1912816일자 더운피를 뿌린 이준”, 1914719일자 이쥰공이 피 흘린 날이란 논설을 하고 있다.

 

청산리 전투와 대한의용군 사령관과을 군비단 사령관을 지낸 이준의 아들인 이용(李鏞 아호:秋山)이 황포군관학교에서 이객우(李客雨)이름도 사용 했는데,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국외 항일운동자료 일본 외무성기록 機密公 1694번째 장에 광동(廣東) 일본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문서에 이객우를 설명하는 글을 보면 헤이그에서 할복분사(割腹憤死)한 이준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동녕 안창호 이동휘..등과 함께했고 남경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조선인 군대 와 북만주 방면 대일 반항 조직을 하였고 1925(대정 14) 광동에 와서 장개석 민국혁명에 참가 등 소개를 하고 있다.

 

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在支那各地 4

문서번호 機密公 169

문서제목 要視察 鮮人言動 略歷에 관한

발신자 森田寬藏(廣東總領事)

수신자 幣原喜重郞(外務大臣)

발신일 19260430

색인어이름 : 谷山(一名 羌世宇), 金元鳳 劉徹壽, 李英駿, 呂運亨, 金嚴海, 李客雨, 李儁, 李東寧, 安昌浩, 李東輝, 李宗萬, 孫斗煥, 姜波, 吳佩孚

지명 : 黃海道, 上海, 安南, 支那, 臺灣, 京畿道 長端, 西伯利亞(시베리아), 滿州, 雲南, 廣東, 平安北道 碧同, 慶尙北道 大邱, 奉天省 寬甸縣, 海牙, 平安南道

단체 : (上海)假政府, 義烈團, 廣東大學, 被壓迫民族聯合會, 露國共産黨, 國民黨, 講武堂, 黃埔軍官學校, 大沙頭航空學校, 鐵血團, 南京士官學校, 韓國革命軍人會, 韓人親睦會

사건 : 要視察 朝鮮人 谷山 등의 言動 略歷

 

일본인들은 한국에서는 이준의 병사 했다고 유포하고 자기들은 공문서 할복분사 했다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일본 공문서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른 증거로는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1907715일 오후 2시쯤 이상설로부터 남편이 자결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국내 한 신문의 19591123일자 보도도 있다.

 

<이양재 선생>

 

이위종은 이준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십시오일본이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그것이 돌아오지 못한 밀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준의 관을 살 돈조차 없었던 이상설은 두 달 뒤인 96일에야 이위종과 함께 다시 헤이그로 와 102달러 75센트를 주고 정식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준 열사 집안에 민영환 공이 자결한 칼이 있었다고 한다.

이준 열사가 고종의 밀명으로 외교적으로 우리의 처지를 알리려고 상해로 나갔는데

민영환 공이 돌아가시자 급거 귀국한다. 그 때 민영환공 집에서 칼을 전달 받은 것 같다.

민영환 공과 이준 열사는 얼마나 절친 했는지는 나중에 밝혀 드리겠습니다.

그 칼을 가지고 가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헤이그로 출발한 후 그 칼이 없어졌다고 한다.

 

1962년 공훈심사 때 일입니다.

이준열사가 자결이냐 병사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병사로 의견이 모아 질 때 민족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사실대로 기록하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공훈 심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하였다.

국사편찬위원장이 이병도 못지않은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만든 조선사편수회 출신인 신석호였다.

당연히 일본 측 눈치도 보아야겠기에 할복분사에서 할복을 제외한 분사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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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21 [13:48]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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