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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5.21 [06:02]
위대한 리더 루터에게 섭리하신 고난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한평우

 우리는 성경에서 바울의 하소연을 대하게 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내 육체에 주셨다는 고백이다.

 

그 가시가 때로는 너무나 아프게 하여 그것이 떠나가도록 세 번 씩이나 주님께 간구했지만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다고 했다(고후12;7-9).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해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붙잡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사역자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 마르틴 루터     ©뉴스파워

 

 

사람은 누구나 그 중심에 부패한 속성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연약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힘을 지니게 되면 여지없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그래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너는 본래 신이었는데 네가 그것을 잊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망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로마의 영웅 시자 역시 그런 어벌쩡한 자세를 취하다가 브루투스 일당에서 죽임을 당했다. 로마의 수많은 황제들 가운데도 그런 자들이 많았고--

 

중세의 위대한 한 사람의 리더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는 수도사 출신의 개혁자 말틴 루터다.

그는 법률을 공부하여 위대한 변호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길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사건을 만났다.

1505년 친구와 함께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중 곁에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고 죽어버린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처럼 생과 사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앞에서 광부의 수호성인 성 안나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살려주신다면 나는 수도사의 길을 걷겠다고 서원했다.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어거스틴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더욱 진력하여 신학박사의 학위까지 받았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어간에 가톨릭의 비 성경적이라고 판단되는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여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에 대하여 교황청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유는 전통적으로 로마 제국 국경너머에 있는 도시 비텐베르크를 바티칸 당국은 학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손을 잡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저 거대한 바티칸을 상대한 투쟁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데 말이다.

당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제후들이 루터 편에 서서 도와주었기에 개혁운동은 수많은 동조자를 얻게 되었다. 또한 루터의 성경 번역을 통한 영적 지식이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눈을 뜨게 된 역할도 컸다.

 

그런데 정작 그 거대한 일을 주도하는 루터는 온갖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수많은 병이 그를 괴롭혔다.

신장 결석, 장으로 인한 복통, 소화불량, 불면증 신경쇠약, 류머티즘, 난청,

신경성 두통, 어지러움, 치통, 만성피로, 우울증, 통풍, 심장질환, 만성적 스트레스 등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질병 들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그의 신경이 곤두설 수 있었겠나 싶다.

▲ 루터 생가 앞에 있는 루터의 흉상     © 뉴스파워

 

 

그 뿐인가?

통풍이 너무 심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목에 종기가 낫지 않아 고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설교를 감당해야 했고 많은 동지들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쉴 사이 없이 논문들과 소책자들을 출판하고 많은 편지를 써야 했다.

그런데 그런 어간에 생후 8개월 된 사랑하는 딸 엘리자벹이 세상을 떠났고,

1542년에는 13살인 딸 막달레네가 죽는 슬픔을 당해야했다.

막달레네의 죽음은 루터 부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딸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루터를 위로하는 귀여운 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와 성찬에 대한 논쟁은 그를 힘들게 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에 대하여 잘 몰랐다. 만나지 못할 때는 성찬의 해석이 다른 그를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화합의 필요성을 느낀 헤센의 제후 필립은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1529년 마부르크에서 회담을 주선했다. 독일 황제가 비대해져 감으로 개혁의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양쪽에서 5십여 명이 모였다. 루터는 츠빙글리에게 이단이 아님을 증명하도록 요구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하나하나 심문하듯 질문했고 츠빙글리는 성실하게 답변하였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답변을 통해 자신이 상당 부분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교리적으로 츠빙글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스위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 뉴스파워

 

이들은 15개의 조항 중에 14개 조항에 합의했고 단 하나, 15번 째 항목인 성찬 론에서 견해 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나, 주께서 성찬에 현림 하신다는 공재 설을 주장했고, 츠빙글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상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두 사람은 꼬박 이틀 동안 논쟁했다.

 

어떻게 하든 두 사람이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주는 이튿날 아침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그 때 츠빙글리는 눈물을 흘리며 루터에게 다가가 형제로서의 손을 내밀었다. 비록 비본질적인 성찬 론의 해석이 다르더라도 15개 항 중에서 14개의 본질적 항목에서 일치를 보았으니 성도의 사귐을 가질 수 있지 않느냐는 의미로 말이다. 더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부차적인 점들의 차이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교회 안에 결코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눈물을 흘리며 내민 츠빙글리의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루터는 결연하게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을 형제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루터가 왜 그리 편협했을 까 싶다.

그 결과 츠빙글리는 가톨릭의 공격을 받아 4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고, 루터는 칼5세의 공격으로 종교 개혁의 본거지인 색소니(saxony)를 빼앗겼다.

후에 로이드 존스는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분쟁이 로마 가톨릭의 모든 천둥 벼락이 합한 것보다 더 큰 해를 참 종교에 끼쳤다고 술회했다.

루터파 신학자인 브릴리요(Yngve Brilioth1891-1959)은 루터가 수도회 생활과 라틴 전례형태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루터는 죽기 전에 칼빈이 쓴 주님의 성만찬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멜란히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너무 지나쳤다고 술회했다.

칼빈은 선배인 루터를 존경했고, 루터파와 개혁파의 연합을 위해 두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여 영적 임재 설을 내 놓았다. 그리고 450년이 지난 1973년 로이엔 베르크에서 개혁주의자들과 루터 파는 성찬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 방식에 대한 논쟁을 중단하고 그 의미에 집중하기로 결의했다.

 

비본질적인 문제도 합의하기가 이처럼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사실 동방정교회와 가톨릭도 아주 작은 문제로 갈라졌다.  진리의 문제보다는 자존심의 문제로….

 

▲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 뉴스파워

 

교황의 파문은 독일에서의 추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력자 작센의 선재 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교황청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고, 만약 마음이 달라진다면 루터는 화형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잔 후스처럼 말이다.

그러니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예민함으로 전전긍긍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 같이 찾아오는 동지들이 30-40여명이 되었으니 돕는 사람도 없는 정황에서 그 뒷바라지를 묵묵하게 감당하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아내는 귀족 출신의 수녀이었는데 루터가 수도원에서 탈출시킨 여인이었다. 루터는 강인하고 화를 잘 냈으나 카타리나는 매사에 온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나는 불란서나 베니스를 준 다해도 카타리나와 바꾸지 않겠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런 사랑하는 아내인데 남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가축을 키우고 젖을 짜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면서 남편을 후원하였으니 어찌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없었을 까 싶다.

 

거기다가 농민 전쟁에서 자신들을 돕지 않았다고 돌아서버린 수많은 사람들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 위대한 리더가 짊어져야 하는 버겁기만 한 무거운 짐,

그 짐을 지고 비척거리면서 진리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갔던 말틴 루터,

 

말틴 루터, 그가 걸어간 진리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의 고난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음은 그에게 진 빗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루터에게 진 빚이 많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붙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사람의 진정한 영적 리더인 말틴 루터, 그가 중세의 영적 캄캄함 속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던 오직 믿음(Sola fide)을 우리는 다시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을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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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29 [14:03]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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