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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3 [10:13]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뉴스파워 윤지숙 기자

 

VI. 예수의 섬기는 모습: 공감, 연민과 눈물, (생명 증정)로 섬김

 

예수의 섬김에는 그가 가진 인간적인 공감, 연민, 눈물과 피(생명 증정)가 있었다. 예수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문제와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공감의 마음, 연민의 마음을 가지셨고, 눈물을 흘리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셨고 그 자신의 생명을 증정하신 섬김의 사람이었다.

 

1. 공감(共感, compassion)의 마음

 

예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율법을 들먹이며 율법을 범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율법이 지닌 의(정의)와 인(인자)과 신(신뢰)을 알고 실천하는 지도자였다. 예수는 그에게 다가오는 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약한 자들을 향하여 공감(compassion)을 가졌다.

 

예수는 광야에서 5천명과 4천명을 먹이실 때도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시고 염려하였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는 5천명의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마태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4:14a). 그 후에 예수는 4천명의 군중들과 같이 광야에서 3일 동안 지내시면서 저들이 먹을 것 없이 돌려보내는 것에 대하여 이들 중 멀리서 온 자들은 도중에 기진(氣盡)할가 염려하시고 불쌍히 여겼다”(8:2). 예수는 군중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긍휼의 사역자이었다.

 

예수는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19:4), 지붕에서 기와를 벗기고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그 앞에 달아 내린 병자(5:19), 그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덴 12년 혈루병 앓은 여인(5:27) 등 자기에게 나아오는 여러 종류 사람들의 회개와 참된 삶에 대한 진정한 갈망에 공감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를 영접한 삭개오를 칭찬하시고 그 지역에서 비난받는 삭개오 집에 유숙하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19: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 한 소경이 예수가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니 더욱 그것 소리를 질러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어신다. 예수는 그에게 다가가셔서 물으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나.” 그는 대답한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시고 그를 고쳐주신다. 예수는 지붕에서 침상채 내려온 중풍병자를 향하여 위로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20). 예수는 12년 혈루병 앓은 여인도 고쳐주시고 축복하시면서 돌려 보내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쩌어다”(5:34). 여기에서 우리는 그에게 구원을 청하려 온 모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의 처지에 대한 예수의 공감하는 마음을 보게된다.

 

2. 연민의 마음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긍휼의 덕성을 가르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예수는 그에게 와서 꿇어 엎드려 고쳐달라고 구하는 나병환자를 민망히 여겨서”(1:41) 고치신다. 갈릴리 호수 지경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데리고 온 귀먹고 어눌한 자를 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그를 고치신다(7:34).

 

예수의 치유와 기적은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를 전시(展示)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징표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며, 내면적으로는 질병에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憐憫)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9:36). 예수는 능력만을 지니신 자만이 아니라, 마치 부모가 고통 당하고 있는 자식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처럼, 질병으로 고통당한 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셨다.

 

예수가 보여주신 탕자의 비유에서도 집 나간 아들 연고(緣故)로 대문을 열어놓고 그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긍휼을 가르치고 계신다: 타국에서 돼지의 쥐엄열매로 배고픔을 체험하고 극도로 낮아진 탕자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5:19). 탕자는 이제 품군의 하나로 보아 달라는 낮아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연민을 가지고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15:20). 이에 아버지는 아들은 영접하고 큰 잔치를 배설한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은 하나님을 등지고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긍휼을 보여준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모두 자기에게 오라고 하신다. 예수는 자기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가 주시는 멍에을 메고 배우라고 하신다. 예수는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멍에는 쉽고 그가 주시는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산상설교는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서 실천하고자 할 때 부드러운 멍에이며 가벼운 짐이다. 그것은 바리새적 율법 준수와 비교할 때 우리와 이웃을 풍요하게 하는 진정한 삶의 원리다(23:4; 11:46). 예수의 멍에를 메는 사람은 자기가 짐을 나른다기보다는 예수가 그 사람의 짐을 날라 주신다.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랑의 새 교훈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마음 속에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3. 눈물을 보이심

 

예수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동생 나사로가 죽어 무덤 속에 놓여 있는 것을 보시고 누이 마리아가 울고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신다. 예수께서도 마음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요한은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3-35).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고 가족과 친척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예수의 진정한 인간된 모습이다. 이 장면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가 신성과 더불어 진정한 인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탄식하시는 예수의 인간적 모습은 그가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멸망의 모습을 예언적 통찰로 선취하면서 드러내는 그의 감정 표출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메시아인 자신을 배척하는 예루살렘 거민을 향하여 탄식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13:34; 23:37-39). 예수는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그의 사랑을 암탉이 새계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하였다는 모성애적인 정과 함께 앞으로의 멸망에 대한 한탄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까이 가셔서 우신다. 누가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19:41-44).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의 눈물은 그의 메시아적 선견적 통찰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눈물은 그의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눈물은 예루살렘 거민에게 다가올 비극과 참혹을 예언적 환상에서 보시면서 흘리신 사랑과 공명과 연민의 눈물이다.

 

4. 생명(몸를 주시고 피를 흘리심)을 주심

 

마가와 마태는 섬김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동일한 어구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10:45, 20:28). 그러나 두 문장의 접두어가 다르다. 마가복음에는 왜냐하면”(γάρ, for), 마태복음에는 이와 같이”(ὥσπερ, even so)가 있다. 마가에 의하면 섬기는 자 예수는 대속자로 오신 것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섬기는 자이므로 대속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섬김과 대속이란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진정한 섬김이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섬김의 정신이 보여진다. 이러한 섬김의 정신은 대가를 바라는 인간의 조건적 섬김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자기 주심을 보여준다.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영광의 메시아로 이해하지 않으시고 섬기는 종으로 이해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고난의 종, 즉 섬김의 종으로 이해했다.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은 그가 잡히시기 전 날 가지신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찬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하시고, 그리고 그는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2-23; 26:26-27; 22:19-20)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그가 말씀하신대로 체포되어 십자가 형을 언도받고 십자가에 못박히어 두 손과 두 발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다. 십자가 처형의 목격자인 제자 요한은 예수가 죽은 것을 보고 로마 병정이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19:33-34). 이에 대하여 요한은 그의 서신(書信)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오심이 물과 피로 임하였고. 그가 물과 피를 흘리심이 대속(代贖)의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성령이 증거한다고 해석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5-8).

 

역사적 예수는 우리의 대속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어 물과 피를 흘리셨고, 이 대속의 사실을 우리 마음 속에 증거하시는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오셔서 대속의 은혜를 조명하시는 성령이시다. 이것이 지난 과거의 대속사건을 2천년이란 시간의 거리를 뛰어 넘어 우리 마음 속에서 현재적 사건으로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실존적으로 의미있게 연결시키는 성령의 현재화 역할이다. 성령의 현재화 역할로 인하여 물과 피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죄인을 구속하는 대속적 효능을 갖는다. 물과 피는 더 이상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적 새로운 정화와 생명증여의 사건이 된다.

 

VII.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신 예수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약자를 조롱하거나 학대하는 자는 곧 자기를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17:5).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는 사회적 약자,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셨다. 예수의 이러한 사상은 사회적 약자와 병자에 대한 그의 치유와 섬김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예수는 최후의 심판 시 그의 심판의 기준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그에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음이 그에게 하지 않음으로 간주하신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37-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5-46). 오늘날 부와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자신을 부한 자와 권력자가 아니라 지극히 약한 사회적 소외자와 동일시하는 것이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보여주신 섬김의 정신이다.

 

VIII. 죄를 사유(赦宥)하심

 

예수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저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예수는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고 말씀하신다.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깨뜨리고 내려진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죄를 사함에 있어서 예수는 그를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2:5). 예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너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7:47)고 말씀하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교훈하신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서 앉았을 때 죄인인 여인이 예수 뒤로 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적시었다. 예수는 이 여인을 향하여 너의 많은 죄가 사()해졌도다”(7:48)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여인의 행동이 큰 죄의 빚을 탕감받은 은혜에 대한 내면의 진정한 감사에서 나온 행동임을 아신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 시몬은 이 장면을 보고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7:39)고 마음에 이른다. 예수는 그의 내면의 생각을 아시고 그에게 다음같이 말씀하신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7:44-47). 여자는 사회적으로는 창녀(娼女)라는 비방을 받는 자였으나 예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 예수의 섬김은 죄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병자들을 물리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삶을 살도록 하신 데 있다. 이는 단지 그의 인간적 위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인적 메시아적 품성에서 나온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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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27 [09:1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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