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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06.25 [12:04]
칼은 쓰기는 쉬우나 후유증은 영원하다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
 
한평우

 역사적으로 극한 긍정과 부정으로 평가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가 있고, 칼뱅주의자요, 청교도였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많겠지만 말이다.

▲ 올리버 크롬웰 동상     © 한평우

 

 

그는 영국 동부의 청교도이자 젠트리 계급(영국에서 중세 후기에 태동한 중산층 토지 소유자)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의회 의원과 치안판사를 지낸 로버트 크롬웰과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스튜어드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시킴으로 의원생활은 아주 짧게 끝나고 말았다. 당시는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시기였다.

 

찰스 왕이 직권으로 의회를 해산한 후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의회는 열리지 않았기에 정치적으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그 당시 성직자의 타락상은 대단했다. 그런 부분을 보면서 크롬웰은 왕에게 진정서도 보냈으나 움직이지 않으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속에 분노만 깊어졌고.

 

그는 철저한 청교도 신앙인이었다. 그는 한 기도문에서 비록 부족하고 허물 많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기를 소원했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쓰임 받기를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메모 일지에는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라고 기록되었고, 전쟁터의 동료에게 보낸 서신에는 저는 당신의 겸손한 보잘 것 없는 종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곤경에 처할 때는 참모들과 기도했고, 어느 때는 며칠 동안 응답이 오기까지 계속 기도하기도 했다.이런 믿음의 자세는 청교도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가톨릭에 탄압받는 개신교 보호를 위해 평생 목숨을 걸었다. 특히 이태리의 북쪽 토리노의 피에몬테(Piemonte)에 거주하는 왈도파 학살 소식을 듣고 관련국들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런데 학살에 가담한 가톨릭의 부대 중 절반이 아일랜드인 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 왈도파를 제거하라는 가톨릭의 명을 받고 왈도파 민간인들을 아주 잔인하게 공격했다. 마을을 불태웠고 아이들을 바위에 던졌고, 여자들은 발가벗겨 창으로 찔러 매달았다. 이 소식을 듣고 크롬웰은 공동체 일원들이 당한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다. 그는 불란서와의 협정에 관한 조약의 제의를 받고 마자랭 수상이 왈도 파들을 구하는데 나서겠다고 서약할 때까지는 결코 협상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개신교도들을 향한 박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라면 불란서, 아니 전 세계와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고 선포했다. 결국 그를 두려워한 루이 14세는 왈도파를 사면하겠다고 약속함으로 학살은 중단될 수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의 가톨릭교도들에 의한 신교도 학살은 아주 잔인했다. 예수회 창시자 익나티우스 축제일에 맞춰 아일랜드의 예수회 회원들은 모든 개신교도들을 학살하기로 결심하고 시행했다. 학살은 아주 잔인했는데, 눈을 뽑고 손을 잘랐다. 자식이나 남편을 죽일 때, 부모나 아내로 하여금 나서도록 강제하였다. 압제자의 강압에 의해 자식이나 어미를 죽이는 일에 자녀나 부모가 동원되는 일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이처럼 종교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함에 자신을 내 맡기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전혀 불신자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불신자보다 더 추악했다. 이 때 죽은 자들의 수가 15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올리버 크롬웰 동상     © 한평우

 

 

이 학살은 크롬웰이 이끄는 군대가 아일랜드에 상륙함으로 비로소 중단되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런 잔인성이 존재한다. 고로 조심하지 않으면 이런 강포함의 노예가 되기 쉽다. 역사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한다.

 

나치의 전범 재판에 어렵사리 방청권을 얻어 재판을 방청한 사람이 있다. 그는 나치 전범자의 잔인한 행동에 큰 쇼크를 받았기에 그런 자는 사람이 아닐 것으로 여겼다.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을 까? 라는 퀘션 때문이었다. 그는 나치 전범자는 사람이 아닌 괴악한 자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재판정에 들어가서 전범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전범자는 머리에 뿔이 달린 무섭게 생긴 자가 아니라 길에서 흔히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초라한 노인을 보는 순간 자신 속에 꿈틀대고 있는 잔인한 부패한 질료를 보게 되었다. 그 잔인함은 어떤 계기가 될 때 표면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런 잔인한 전범이 바로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갈파하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 잔인한 범죄자들을 보며 흥분하지만 실은 우리 안에도 그런 흉포함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크롬웰은 부당한 왕당파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군대를 엄격하게 훈련 시켰고 전쟁의 분명한 목적을 병사들에게 가르쳤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비 성서적인 가톨릭교도들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병사들에게 주입 시켰다. 특히 찰스 1세는 가톨릭으로 복귀하려고 모의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래야 청교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지도력은 발휘되었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차 찰스 1세의 왕당파 군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는 막강한 권한을 손에 쥐게 되자 찰스 1세와 그와 협조한 무리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다.

 

평민들로 구성된 군대가 직업군인들을 상대하여 이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국민에 의해 왕이 처형당한 일은 구라파에서 처음 있는 일로, 구라파의 각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는 군주제를 버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은 호국경이 되었다. 일종에 대통령 같은 직책이다. 그는 전쟁의 귀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 숭배 론에서 크롬웰을 영국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했다.

 

그는 더 나아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스코틀랜드를제압했고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명암이 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말이다. 강력한 힘으로 영국을 다스렸는데 그도 결국 59세인 1658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아들에게 자리를 넘겼으나 1660년 왕정복고 운동이 일어났고, 1661년 왕을 시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그의 묘는 파헤쳐지고 부관참시가 행해졌다. 우리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니 놀랍다. 그의 목은 24년 동안 매달렸다가 결국 그의 모교에 안장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찰스 왕의 목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이미 힘없는 왕이요, 패배한 무력한 왕인데, 귀향을 보낸다던지 구금을 시키는 정도로 처리했다면 역사는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대하지 않았을 까 싶다.

 

또한 아일랜드를 징벌할 때 지나치게 잔인하게 도륙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있다.

물론 아일랜드의 가톨릭은 개신교도들을 말살시키려고 극악하게 공격했다그리고 실제적으로 큰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만행을 보고 크롬웰 역시 아주 잔인하게 보복했지 싶다. 역사적으로 볼 때 크롬웰은 당시 아일랜드 주민 1/4을 멸절 시켰다고 한다. 이런 잔인함은 현재까지도 아일랜드인 들의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일이라고 한다.

 

더구나 종족 면에서 볼 때 영국은 바이킹 족의 후손들이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켈트 족이다. 오래전에 월드컵이 있었을 때 교회당을 빌려 쓰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님은 영국과 아일랜드 경기가 있을 때 아일랜드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이런 부분이 잔인성을 부추기는 편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명분하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 일에 나서기도 했다. 즉 전통적으로 1천년 이상을 지켜오던 1225일 성탄절을 성경에 없다고 금지시켰다. 그런 원리 주의가 사람들을 실망케 하고 그를 멀리하는 동기를 만들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다는 것, 그것처럼 때로 독선적이고 고약한 일은 없다. 신앙의 이름으로 함부로 타인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려는 집념과 결심은 때때로 독선을 낳고, 타협을 불허한다. 그런 점이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에게 아쉬운 점이지 싶다. 주님은 바다같이 넓은 마음이신데 그를 믿는 우리는 왜 그리 옹졸하고 편협한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수밖에 없는 <소수점>의 문제로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우리다. 그의 동상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갑옷차림으로 한손엔 칼과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힘이 주어질 때,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손에 든 칼이 날카롭게 반짝거릴 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함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것은 순간에 끝나지만 그 후유증은 한 세기 아니 영원토록 잊히지 않는 고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로 모든 권력자들이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칼은 사용하기는 쉬우나 그 후유증은 영원하다.” 는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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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26 [05:48]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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