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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0.20 [06:05]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이승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조직신학)     © 뉴스파워 윤지숙 기자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들이 과연 어떤 것이 있는지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더구나 그것들이 기독교 세계관과 어떤 관계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나 어렵지만 이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을 깊이 분석하는 일은 동양 사상, 특히 한국 사상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 짧은 글에서는 한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전통적 세계관들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조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고찰의 목적은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전통적 세계관의 영향 받은 요소들을 극복하고, 온전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잘 드러내도록 하려는 것이다.

 

1. 샤머니즘(Shamanism)과 샤머니즘의 영향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뿌리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통적 요소는 역시 샤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먼 조상들이 우랄 산맥을 넘어 오기 이전부터 우리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교(巫敎)는 다른 지역의 샤머니즘과 비슷하게 무당(shaman)이 행하는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우리에게서 화()나 액()을 물리치고, ()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다. 무교는 본래 오직 현세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종교들의 영향으로 후기에는 죽은 후의 상태에도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무교적 사유 방식에 의하면 이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시간과 장소는 구별된 시간과 장소여서 이 때는 매우 조심해야만 종교적 의식(儀式)을 행하는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의식(儀式)이 행해지는 시간과 장소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고, 일상생활과는 좀 다른 의식과 몸과 마음의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는 점과 이런 의식을 위해서 정성과 상당한 재화를 드려야 소기의 목적이 더 잘 이루어진다는 일종의 형성주의적 사유방식이 무교에 의해 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도 철저히 성경적 개념에 유의하지 않으면 이전 시대의 불교도들이 상당히 샤머니즘적 불교도가 되고, 유교적 제사를 하던 사람들이 조상신이 복주기를 바라며 제사를 모시는 샤머니즘적 경향을 띤 것과 비슷하게 샤머니즘적 기독교도가 되기 쉬운 것이다. 우리의 기복(祈福)적 정향성은 벌써 이것을 강하게 시사(示唆)하기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어 자기중심에서 참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헌신과 변화와 하나님 중심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기복종교의 특성을 나타내기 쉬운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생각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난무(亂舞)하며, 그것을 문제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은가? 이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형국(形局)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말로만의 헌신과 자기 변혁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철저한 가기 변혁이다. 자신이 복 받는 것조차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변화하여 참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예배를 위한 특별한 시간과 장소만을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예배 시간에 정성을 다하고, 일상생활은 조금은 느슨해도 된다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성속(聖俗) 이원론(二元論)은 아마도 샤머니즘에서 온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영육 이원론은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와 수도원 운동의 영향 가운데서 나온 것이라면, 한국에서의 성속 이원론은 샤머니즘과 이 영향 하에 있던 불교의 영향과 유교의 형식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것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살았던 지 굿하기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와서 굿하는 장소에서 마음과 몸을 단정히 하고 그 종교 의식에 임하여야 그 종교 의식이 효과를 발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진 한국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삶의 방식과 예배하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삶의 태도는 달라야만 하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게 된 것 같다.

 

그러므로 기복주의적 성향과 성속의 구별을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무교로부터 양향 받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을 극복해야 기독교가 진정 기독교다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2. 불교적 세계관과 그 영향

 

한국에 처음 들어 온 소위 고등 종교(the Great Religions)로는 불교(佛敎)를 말할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난과 존재하는 자체의 고난인 소위 본고(本苦)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삶의 계속되는 윤회(輪回)에서 벗어난 존재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려는 노력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 nirvana)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는 각자가 근본적으로 그렇게 깨달은 자인 부처(Buddha)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또한 불교의 최고 원리인 중도(中道)를 깨달아 모든 존재의 여실한 모습을 보게 되면,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 번뇌가 곧 깨달음이므로(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 생사와 열반은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교를 가장 잘 파악한 빛에서 보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一體唯心造). 그런 입장에서 보면 해탈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고, 사실 그것이 실재하는 아닌지를 따지는 것조차도 초극(超克)한 상태가 열반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불교는 현실에서 시작하여 고난으로 가득찬 이 현실에서 어떻게 벗어나 해탈하기를 바라는 종교이다. 기독교인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1) 이 세상에서의 삶은 적극적 가치가 없고 무의미하며, 오직 죽은 뒤의 세계만이 바른 세계인 양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도 불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2) 또한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덕을 쌓아야 죽은 후에 잘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세상의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주장으로 불교도 이를 강조하기에 기독교인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생각에 쉽게 동화되기 쉽다. 이와 연관된 것으로 (3) 불교에는, 특히 선불교(禪佛敎)에는 다양한 수행법(修行法)이 있는데, 서구에도 그와 비슷한 것을 종교적 경험에서 사용하려고 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더 영적이기 위해 이런 수행법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관상 기도가 제시하는 관상의 방법과 선()하는 방법을 비교해 보라. 넷째로, (4) 불교가 무교의 영향을 받아서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며 정성껏 발원하여 기도하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복주의가 무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들 가운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5) 전생(全生)과 후생(後生)을 말하는 불교적 윤회관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언어생활에도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기독교가 이 땅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3. 유교와 그 영향력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 온 유학(儒學)도 여러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유학의 이상을 제시되는 것은 마음(심령)과 몸(사공)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도리에 일치하여 조화 있게 활동되는 것이다(田愚, 󰡔유학(儒學)󰡕, 1912). 그러므로 유학은 만물의 질서를 정확히 파악하려 하면서 참 사람됨을 실현하는 것인데, 인간이 노력하면 이런 것을 잘 이룰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형태의 유학은 만물의 이치에 대한 파악과 참된 인간됨의 실현을 노력 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형태의 유학도 인간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過信)하는 것이 된다.

 

그런가하면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온 잘못된 형태의 유학(1)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 할까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허례허식(虛禮虛飾)에 치우치는 문제를 가지고 있고, (2) 조상 제사에 무교적 개념을 불어 넣어 조상신의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기복주의와 연관하여 본래 유교적 제사의 정신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3)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상(班常, 즉 양반[兩班]과 상민[常民])의 구별과 좀 나은 경우에는 군자(君子)와 군자가 아닌 범용(凡庸)한 사람을 구별하여 사람들을 차별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쉽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양식에 딸 구별하고 그 구별을 철저히 하는데 근자에는 다른 것들 보다도 나이에 따른 구별을 지나치게 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세계관 안에서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빠지기 쉽다. 그리하여 (1) 우리의 삶과 교회의 행사들에도 허례허식이 나타날 수 있다. 헌금하는 일에 이런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2)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하늘에서 하는 기도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도 유교적 조상신의 축복의 기독교적 변용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3) 사람들을 구별하고, 나이든 사람은 성경의 원리도 무시해도 되는 듯 한 사고방식은 가장 자주 나타나는 우리들의 문제이다.

 

이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사상들이 혼합한 형태로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여러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정황 가운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서 세상의 방식들을 잘 분별하는 것이다.”그래서 성경은 항상 깊이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참 된 기독교를 잘 구현하는 길은 성경을 잘 연구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와 같은 여러 생각들을 잘 생각해 보고, 혹시 우리들 안에 그런 것의 영향이 없는지를 생각하여 그런 영향을 받은 종교적 양태들을 극복해 나가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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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16 [12:5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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