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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8.17 [23:04]
나의 삶과 사역을 축복하신 주님의 은혜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목사, 한복협 회장) 설교문
 
김명혁

 나의 삶과 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용인 꽃동산교회(2016.10.30.11) 

고전15:10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부족한 사람이 오늘 20161030일 주일 여기 용인 꽃동산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저의 삶과 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임재성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임재성 목사님이 오늘 저의 삶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아침 나의 삶과 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살아온 저의 한 평생의 삶과 사역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도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물론 저는 사도 바울처럼 수고를 많이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5,16). 물론 저는 아무에게도 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저의 고백으로 삼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5:20,21).

 

죄가 많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욱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다윗도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자기에게는 죄밖에 없지만 동시에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3)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103: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145:8).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139:17,18). 그러면 이제부터 나의 삶과 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저의 삶에 대한 간증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저는 어릴 때부터 순교자들"의 피와 생명을 체 받으며 살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안주와 신의주와 평양에서 보내면서 일제와 공산치하에서 핍박을 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 준 "순교"의 유산을 몸으로 체 받으며 살았습니다. 신의주는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이 일제 하에서 핍박을 받은 곳이었고, 평양은 최봉석, 주기철, 김화식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님들이 일제와 공산치하에서 핍박을 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9년 동안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목회 사역을 했고 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 사역을 했는데 신의주와 평양에 계실 때 자주 감옥에 붙잡혀 가서 감옥생활을 하셨습니다. 저는 1011살 때 평양 서문박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주일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의 신앙을 배우며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일성수새벽기도순교의 신앙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평양 제오 인민학교에 다닐 때 주일날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교회에 간다고 2년 동안 매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을 굽히지 않고 감옥에 자주 가시는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양 사동 탄광에서 복역 중이신 아버지를 찾아 갔습니다. “주일성수예배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가서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저는 만 11살 되던 해인 19488월 사랑하는 어머니와 세 동생들과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북에 두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38선을 넘던 날 밤 우리 일행은 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지 않고 혼자서 온 힘을 다해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강을 건너면서 40 여분 동안 달려서 남쪽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도 느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쪽으로 와서 어느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청년 한 사람을 만났는데 어디로 가냐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누구하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같이 오던 사람들이 모두 붙잡혀서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저를 기차에 태워서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주소 하나를 가지고 서울에 왔는데 서울에 사시던 이모님을 만나게 되어 이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고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밤에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지만 영락교회에 다니며 주일성수새벽기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들어가기를 원하는 서울 중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도 했습니다. 저는 고아로 나그네로 외롭게 살았지만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소년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순교자들의 피와 부모님의 순수한 믿음과 기도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되어졌다고 저는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저는 중학생과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신앙의 선배님들로부터 회개의 신앙과 은혜 사모의 신앙을 전수 받았습니다.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저는 부산에까지 피난 갔다가 다시 대구로 올라와서 3년 동안 그곳에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고 새벽기도를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성봉 목사님께서 석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이 모조리 좇아 다니며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된 부흥회에 아마 12번은 참석했을 것입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집회 때마다 재미있고 은혜로운 말씀을 전했고 특히 회개의 메시지와 은혜 사모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들을 헐떡거리며 받아먹곤 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고 복음의 대지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물 고기가 혹 물을 떠나서 사는 법이 있어도 신자들이 은혜 떠나서 사는 법이 없다.” 저는 회개은혜 사모의 신앙이 너무너무 귀중한 신앙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둘째이고 신앙생활이 첫째였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 저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 저의 기도 제목이라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저를 알아보시고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묻지도 않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를 해 주시곤 했습니다. 아마 3년 동안에 안수기도를 12번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도 때문에 제가 평생토록 목사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대구 어떤 교회에서 잘비스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통역을 하셨습니다. 어느 시간에 잘비스 목사님이 죄와 허물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죄와 허물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회개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회개했는지 기억이 나는 않지만 제가 앞으로 나가서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회개를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은혜 사모의 신앙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삼 년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고등학교에 다니면서 3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그 다음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 4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교회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시간은 물론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리고 은혜 사모전도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는데 그 메시지들이 저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재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회개하고 은혜를 사모하면서 새벽기도를 빠지는 일이 없었고 새벽기도 후에는 남산 어느 숲으로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연초마다 3 일 동안 하는 금식기도에 빠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삼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회개은혜 사모의 메시지와 함께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습니다. 28천 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28천 여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들판에서 예배 드리기가 불편해서 근처에 있는 학교의 교실 두세 개를 빌려서 어린이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한양제일교회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3때는 공부에 미쳐야 하는데 저는 전도와 목회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전도목회를 계속했습니다.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교회였지만 어떤 교인들은 우리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귀한 분들의 가르침과 기도와 사랑으로 되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대학생 시절 신앙의 친구들과 함께 새 생활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진학할 때 세 분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명신홍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가기 전에 대학교에 가서 무엇을 전공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역사학이나 영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결국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조언을 따라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릅니다. 4년간의 역사공부는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고 저의 안목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문리대에서 공부할 떼 전공은 다르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 친구들을 만나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공부는 둘째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이 첫째였습니다. 19604. 19가 일어나던 때 한국의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쌓여 있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이 시대에 우리 신앙의 친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몇몇 친구들이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서 진지하게 논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 문리대 안에서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19604. 19 직후 서울 문리대 교정 안에 한 편에서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민 계몽운동발대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5, 6명의 기독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새 생활운동"이 태동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합의한 결론은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부조리한 실태를 조사한 뒤 문리대 소 강당에서 그것을 발표한다고 공고했습니다. 손봉호 친구가 사회의 부조리한 실태를 조사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소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에게 밀수로 수입되는 커피와 양담배의 일년 분 밀수 액이 대전시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값과 같다는 조사 내용을 발표하자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문리대 학생 수백 명이 방학이 시작되던 6월부터 거의 한달 동안 매일 새벽부터 함께 모여 밤늦게까지 다방과 공원과 시장과 극장과 댄스 홀과 요정과 국회 등을 찾아 다니며 새 생활운동"을 펴 나아가자고 호소했습니다. “새 생활운동은 사회 변혁을 내 세웠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앙운동이요 윤리운동이었습니다. “새 생활운동이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나중에는 장 면 정부의 신 생활운동으로, 박정희 정부의 새 마을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젊은 시절 신앙의 친구들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신앙의 친구들과 함께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평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작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그리고 신앙의 친구들과의 교제와 협력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저는 신학과 역사신학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안목양면성그리고 삶의 지혜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저는 당시 용산에 소재한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교수진은 박형룡,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등의 교수님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저는 특히 한철하 박사님으로부터 학문적 도전과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총회신학교에서 세 학기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의 훼이스 신학교로 유학하여 신학수업을 계속했습니다. 무턱대고 돈 백 불을 가지고 미국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지만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훼이스 신학교에서의 유학생활은 넉넉하고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1964년 훼이스 신학교를 졸업한 후(B.D. 학위 취득)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석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했습니다(Th. M. 학위 취득).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이론이었는데 이는 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 신학원에 입학하여 석사과정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는데 그 한 해 동안의 수학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습니다(S.T.M. 학위 취득). 역사신학 교수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님의 강의는 명 강의 중의 명 강의였고 그 분은 제가 만난 교수들 중의 교수요 학자들 중의 학자였습니다. 펠리칸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쓴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이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수업하던 시절 교회사의 대가인 라토렛 교수님과 베인톤 교수님과 친분을 갖게 된 것은 너무너무 귀중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일대학 신학원에서 석사학위(S.T.M.)를 취득하고 졸업할 때 에드워드 흄 휄로우십을 받았는데 그 상금의 대부분을 총신대학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 장학금으로 그리고 일부를 한국의 개척교회 후원금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 중 여름 방학에는 물론 학기 중간에도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훼이스 신학교에서는 건물 청소, 식당 웨이터 일, 인쇄소 일 및 건물 페인트 하는 일을 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에는 화장실 청소, 식당 웨이터 일, 화학 도금 공장 일, 정원 가꾸기 일, 주택 페인트 일,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판매 일 및 접시 닦기와 백화점에서 판매원 일등을 했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주로 학교 도서관 일을 했고, 아이오와에서 공부할 때는 주로 주택 페인트 하는 일을 했습니다. 요사이는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공부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일하던 일들 중 주택 페인트 하는 일과 정원 가꾸는 일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열 아래서 이층 또는 삼층 주택 벽의 낡은 부분들을 베껴 내고 보수한 후 그곳을 깨끗하게 페인트 하는 일과 넓은 정원의 풀을 깎고 흐트러진 화단을 깨끗하게 새로 단장하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하다 말고 풀밭에 들어 눕곤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낡은 집이 새 집으로, 흐트러진 정원이 단정한 정원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일대학 신학원을 졸업할 무렵 몇몇 학교 박사 과정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는데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장학금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저에게는 해당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그만 헌 자동차에 짐을 모두 싸 가지고 무조건 아이오와시로 달려갔습니다. 종교학과 주임 포렐 교수님을 만나 박사과정에 입학시켜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장학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나에게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달려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포렐 박사님이 저를 한참 쳐다보시다가 그러면 할 수 없이 그 장학금을 나에게 줄 수 밖에 없다고 해서 저는 그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포렐 교수님은 제가 살 수 있는 숙소까지 마련해주셨고 나중에는 저를 조교로 써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무작정 모험적으로 "막가파"로 돌진해 나가므로 저의 일생을 헤쳐 나가곤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너무너무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오와 시에 있는 동안 광활한 옥수수 밭과 연못들로 이어진 자연을 즐길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인 학생 가정들과의 교제를 증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오와 시에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인 교수들과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30여명이 살고 있었는데 한인들 사이에 별다른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인들이 만나는 장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운동회, 야유회, 회식 등을 마련했고 "아이오와 소식지"를 만들어 한인들간의 경조사를 알리며 교제를 증진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한인회가 만들어 졌고 수년 후에는 한인교회까지 만들어 졌습니다. 저는 한인들뿐 아니고 외국 학생들과의 교제를 증진하는 일도 도모했는데 많은 즐거움과 성과가 있었습니다. 인생은 만 남나눔교제소통기쁨인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오와 대학에 머물면서 아이오와 대학, 아퀴나스 신학원, 드뷰크 장로교 신학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등록을 하고 리써치 위주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매고니글, 포렐, 드러먼드 교수 등의 지도를 받아 완성한 철학박사 학위(Ph. D.) 논문의 제목은 두 도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훈에 나타난 종말관의 기능이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제가 취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종교적 욕구(visio Dei)의 성취 가능성의 관점에서 본 현세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인간이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발전해 가는 역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는 데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두 도성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었습니다. 두 도성은 미래적이면서도 현세 실현적인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적 역사관의 특징은 양면성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양면성은 어거스틴의 두 도성에 대한 개념, 현세관, 교회관 및 국가관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어거스틴의 역사적 안목"양면성"은 저의 평생의 삶과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신앙의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특히 "역사적 안목"양면성의 진리를 터득함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다섯째로, 저는 귀국 후 목회 사역교수 사역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고난의 의미를 습득하고 고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7212월 학위논문을 완성한 후 19731월 예일대학으로 다시 와서 리써치 펠로우로 한 해를 지냈습니다. 긴장과 억압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독서와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바로 그 때 뉴욕을 방문한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선구자인 조동진 목사님과의 만 남은 저의 연구와 사역의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동진 목사님은 제가 유학을 마친 후 후암교회에 교육 목사로 오라는 말씀과 귀국하기 전에 풀러신학교 선교 신학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쉽게 잘 듣는 듣는 귀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해 연말 저의 생애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31111일 저의 둘째 아이 철원이가 뇌수종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312월 말 아내와 함께 3살 된 딸 혜원이와 생후 1개월 된 아들 철원이를 오래된 자동차에 태우고 대륙을 횡단해서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 신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여행 도중 철원이의 병세가 악화되어 시속 140여 마일(220 킬로) 속도로 30여 시간을 5분만 쉬고 계속해서 서부 사막지역을 달려서 로스안젤스 췰드런스 호스피탈에 도착했습니다. 입원을 시킨 후 우리는 풀러 신학교 기숙사에 여장을 풀고 19741월부터 풀러 신학교에서의 연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철원이의 이야기를 계속하면 생후 2개월 된 철원이가 뇌 수술을 하기 전 의사가 전해 주는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수술 후 철원이가 장애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철원이가 장애아가 된다면 내가 철원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깊은 고민과 기도 끝에 저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철원이가 내 아들이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저의 사고의 변화는 사람들을 보는 저의 시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본래 착하고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을 좋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덜 착하고 덜 아름답고 덜 신앙이 좋은 사람들도 꼭 같이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너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느냐?" 라는 준엄한 책망이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19741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리써치 어쏘우시에이트로 8개월을 지내며 "선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풀러 선교신학원에서의 선교학 수업은 저의 학문연구와 사역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신학과 사역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신학이라는 학문을 인간의 삶의 처지 즉 목회 및 선교 현장과 연결시키며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31111일에 출생해서 19771010일에 세상을 떠한 철원이의 귀중한 삶과 죽음이야말로 저의 목회와 선교 사역에 깊고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거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1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10월에 귀국하여 후암교회의 교육목사와 총신대학의 강사 그리고 조교수의 사역을 시작했고 조동진 목사님과 함께 선교 사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저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특히 불치의 암 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위로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목회 및 선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함께 철원이의 귀중한 삶과 죽음을 통한 고난의 의미를 터득함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고난슬픔아픔은 결국 보석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로, 저는 목회 사역교수 사역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인생이란 만 남나눔교제소통기쁨이란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74년 귀국 후 후암교회와 영안교회와 강변교회에서의 목회 사역과 총신대와 합동신학교에서의 교수 사역을 한 평생 함께 해 왔고 선교학을 가르치며 선교 사역에도 함께 참여해왔습니다. 저는 지난 40 여년 동안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과 선교 사역을 함께 해 오면서 "인생이란 만 남과 나눔과 교제와 소통과 기쁨"이란 사실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생 삼도, 인생 오도, 인생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복음 삼도, 신앙 오도, 선교 칠도, 회복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만28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제봉사를 목회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교회의 표어를 서로 돌아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힘쓴다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5가지 목표 중의 하나를 북한 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저는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어린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과의 친밀한 교제에 최선을 다했고, 불우한 이웃을 섬기는 봉사에 최선을 다했고, 북한 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순수한 교제봉사에는 순수한 기쁨이 따르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앙의 선배님들과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회개주일성수새벽기도사랑섬김의 신앙을 몸에 지니고 실천하면서 살자고 권면하고 또 권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로부터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라고 생각하면서 200548일 아침 강변교회에서 방지일, 김창인, 강원용, 조용기 목사님 등을 모시고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회개의 모임을 가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변교회에서 은퇴하기 전 5년 동안 매년 11월 한달 동안 매 주일 방지일, 김창인, 정진경, 이종성, 강원용, 림인식, 김준곤, 조향록, 홍순우 목사님 등 원로 목사님들을 모시고 신앙의 선배님들의 귀중한 말씀들을 들으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신앙의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교회 성도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곱째로, 저는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과 교제하면서 선교연합사역에도 관여하게 되었는데, 합신 교단 선교부를 만드는 일에 기여했고, 한국 복음주의협의회, 한국 동반자 선교협의회, 한인 세계선교협의회, 한국 세계선교협의회, 소련선교회, 아시아 복음주의협의회, 세계 스포츠선교협의회 등 선교 단체들을 만들고 발전하게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회개와 십자가 복음으로 연합하고 협력하자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1511일 오후 2시 임직각에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기도회가 모였는데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단과 연합기관들의 대표들을 포함해서 2천여 명이 참석해서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렸는데 부족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면서 회개와 간구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 회개와 간구의 고백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신 것을 이 죄인은 잘 알면서도, 한 평생 민족의 구원은 물론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마음도 몸도 생명도 바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반 화해적이고 반 평화적이고 반 통일적인 아니 반 하나님적인 반역과 위선의 죄를 짊어지고 이기적으로 정욕적으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동족 상쟁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선지자 에스겔에게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라”(37:18) 라는 민족 통일의 사명을 주시고 남북의 통일을 이루게 하셨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민족 통일의 사명을 망각한 채 우리 자신들만 위해서 이기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분단 7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화해는커녕 남남의 갈등과 한국 교회의 분열만 조성하면서 분노와 증오와 정죄와 위선을 몸에 지닌 반 화해적이고 반 통일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죄를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부끄러운 우리 죄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죄를 회개하는 일이고 그리고 우리 북녘 동포들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불순종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북녘의 동포들이여! 우리들의 무정함과 적대시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전혀 자격이 없지만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구원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제물이 되신 것처럼, 스데반 집사와 손양원 목사님이 그 뒤를 따른 것처럼, 우리들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조그만 제물들이 될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여기 모인 부족한 우리들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조만간 우리들에게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여덟째로, 제가 은퇴 후 지난 89개월 동안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계속해서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 평생 저의 삶에 대한 계획을 정해놓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근심도 걱정도 없이 계획도 없이 길이 열리는 대로 그저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즐겁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200818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퇴한 그 다음 주일부터 매 주 한 두 교회씩 지난 89개월 동안 주로 2, 30여명의 성도들을 가진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를 한 것도 저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 와서 설교와 강의를 해달라고 하면 달려가서 설교와 강의를 했습니다. 국내뿐이 아니었습니다. 서 너 달에 한번씩 선교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중국, 연변, 일본, 북한,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남미, 독일, 카나다,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카자흐스탄, 블라디보스톡, 말레이시아, 미국, 아프리카 지역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이곳 저곳에서 불러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부족한 사람이 찾아가는 것을 그렇게도 고마워하니 저는 하나님께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릴뿐입니다. 건강도 주시고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환경도 주시고 즐거움과 기쁨도 주시니 더욱 더 감사합니다. 저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 대부분의 경우 담임 교역자들에게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 부탁 받은 설교 제목을 가지고 정성껏 설교 준비를 하곤 했는데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보람과 의미와 즐거움이 가득한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는 교인 숫자에 맞게 떡이나 빵 그리고 초콜릿을 가지고 가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이들에게는 떡이나 초콜릿과 함께 스티커를 나누어주곤 했는데 모두들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또 와 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한 번씩 또는 두 번씩 방문하는 교회들도 생겼고 서너 번씩 방문하는 교회도 생겼습니다.

 

제가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지니게 된 보람과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다양한 교파의 여러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한국교회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교회가 내가 목회하던 강변교회뿐이 아니고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작은 교회들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좀 더 넓은 마음을 지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여러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교회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품게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라남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경상북도 충천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경기도 거제도의 여러 지역을 제 아내와 함께 둘이서 즐겁게 운전하며 달리면서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산들과 강들과 바다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금수 강산들이었습니다. 운전 기술도 늘었고 전국 지리에 익숙하게도 되었습니다. 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달려 갈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평생 사례를 받았는데 이제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 사례를 받지 않게 되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선교지에 달려갈 때도 사례는 받지 않습니다. 이곳 저곳에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조금씩 펼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평생 건강이나 돈을 걱정한 일은 거의 없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셨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남은 생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 풍족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대로 약한 대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만나서 나누며 가볍고 기쁘게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부족한 죄인을 아직도 버리지 않으시고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그리고 부족한 죄인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한국과 외국의 여러 교회들과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들과 성도님들 감사합니다. 목사님들과 성도님들 감사합니다. 목사님들과 성도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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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0/25 [17:0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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