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국제/NGO/언론교계뉴스한 줄 뉴스파워인터뷰오피니언생활/건강연재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7.12.13 [10:13]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김영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VII.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 용서는 상처 받음과 보복 악순환 해결의 길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 6:12)
이 청원 기도 대목에서 예수님은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허물, 잘못과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 인간의 삶은 가정, 친구, 직장,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회생활에서 인간들 사이에 불가피한 관계의 손상이 발생한다. 이는 욕심이나 탐욕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무의도적인 행위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남에게 죄를 저지름으로써 죄과가 쌓이게 된다. 그리하여 상처를 준 잘못이나 죄과에 대한 보복의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보복하게 되면 당한 자는 다시 이에 대한 보복을 하게 되며 상처 받음과 보복의 악순환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해결의 길을 제시해주고 계신다. 상대방이 나에게 범한 죄과에 대하여는 보복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하여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죄는 복수를 통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용서로써만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범죄한 피조물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용서는 복음서 전체를 통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다음같이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분쟁하는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2. 용서의 힘은 예수로부터 온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회수를 철폐하시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3-35)를 가르치신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약 5천 데나리온이다, 마 20:2)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는 것을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빚 전부를 갚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동료와 타자에게 의도적으로 부지 중에 허물과 죄를 범한 우리들은 먼저 우리에게 허물과 죄를 범한 우리 동료과 타자들의 허물과 죄과를 용서해야 한다.
 
죄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죄가 가져온 상처와 파괴는 성찰하고 치유함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용서하라는 것은 피해를 당하고 상처받은 일에 대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살하라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는 값이 든다. 당한 자가 그 악을 자기 안에서 사랑으로 태워 없애고 스스로 새로워 져야 한다. 이 과정에 그 잘못한 사람을 끌어 들이고 그에게 용서를 선언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악을 용서라는 선으로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용서해 줄 수 없고 오직 인간으로 오신 예수만이 용서해 줄 수 있다. 라인홀드 슈나이드는 말한다: “악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얼굴은 하나뿐이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론적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고난 속으로 내려와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도하신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이러한 청원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용서라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예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다.
 
VIII.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1.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마 6:13a)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청원 기도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 아니하신다. 사도 야고보는 다음같이 말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에 의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예수님은 40일간 인간이 당하는 빵의 시험, 명예의 시험, 세상 영화의 시험을 당하시고 말씀으로 그것들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성정을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예수님은 악마의 시험을 받으시고 이김으로써 시험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악마는 “참소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고발한다.”(요 12:10) 구약의 욥기에서 보면 마귀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9-11) 하나님은 마귀가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하시나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라고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우리 눈을 그리스도 은혜 안에서 항상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고정시켜야 한다. 3세기 교부 키프리안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원수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정성, 그리고 우리의 눈길은 모두 마땅히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패할 수밖에 없으나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다.
 
2. 마귀의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 한다.
 
마귀의 시험이 올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 낸다. 마귀의 큰 시험의 경우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결국 이겨내나 그 극복 과정에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인격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어진다. 좋은 포도주가 되려면 포도즙이 발효해야 하는 것처럼 시험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낮아지고 고통을 당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 인격은 정화되고 변화된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정화(淨化)하고 포기하고 고통 가운데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성숙과 온전으로 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시험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고 통과하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는 섰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넘어지지 않을까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의 묵상과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교만과 명예와 세상의 영화가 주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청원해야 한다.
 
IX. 저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1. 악의 네가지 종류
 
“악에서 구하소서.”(마 6:13b) 주기도의 마지막 청원기도는 바로 앞의 청원 “않게 하소서”라는 부정문을 “하소서”라는 긍정문으로 바꾼다. 악이란 무엇인가? 첫째, 악이란 비도덕적인 것, 비윤리적인 것이다. 탐욕, 불신앙, 범죄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경우 악이란 인격적 존재가 자기 정체성에서 이탈하거나 교만하거나 과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신체의 병듬, 질병이다. 질병이란 건강한 몸과 정신의 상실로서 자연적 건강의 파괴다. 이 경우 악이란 비인격적 물리적 신체적 비정상 상태이다. 셋째, 사회적 불의한 구조나 제도이다. 인신매매, 성매매, 갱 조직, 마피아 조직 등이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패권(오늘날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IS), 알케에다 등) 등은 악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구조적인 악에는 인간이라는 인격적 존재가 연류되어 있다. 넷째, 자연재해가 가져오는 폐해(악)이다. 태풍, 지진, 폭우, 화산의 폭발, 토르네이도, 엘리뇨와 나니요, 기후의 변화 등이다. 이 경우 악이란 자연적인 조화 상태의 상실로서 비인격적 존재다. 이처럼 악이란 비인격적 존재일 수도 있고 인격적 존재일 수도 있다. 두가지가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악이나 악의 상징 배후에는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사에 해를 끼치는 마귀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이러한 악은 개인의 몸과 마음,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 사단이 준동하여 욥의 아들 딸들을 급속히 닥친 재난으로 희생시키고, 욥을 심한 피부병에 허덕이도록 하고, 다윗을 부추겨 욕망을 만족시키러 간통을 저지르게 하고 살인까지 범하도록 하고, 군사적 안정을 도모하러 인구조사를 하도록 한다. 인간 개인의 범죄, 단체의 범죄, 국가의 범죄의 배후에도 악의 원흉인 마귀의 준동이 있다.
 
2. 악은 십자가로 이미 제압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러한 악에서 우리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악의 세력과 공격은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인 우리 주변의 인물과 환경을 통하여 악은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파멸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악의 준동에 결단코 절망하거나 이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악마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며, 악의 권셰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섭리에 악은 사용되고 봉사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악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떠한 악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b) 예수의 십자가로 악의 세력은 이미 제압되었다. 개선의 날은 아직도 오지 않았으나 이제 우리는 개선의 날을 대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천명한 기독교 종말론의 “이미-아직”(already-yet)의 긴장관계다.
 
사도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유 17절)고 경고하면서 이러한 자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8절)고 예언하고 있다. 사도 유다는 마지막 시대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절)
 
X.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 송영은 삽입된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 6:13c) 주기도의 이 구절은 나중에 삽입된 구절로서 짧은 형태의 주기도인 누가복음(11:2-4)에는 없고 긴 형태인 마태복음(6:9-13)에 전승되어 왔다. 긴 형태의 주기도는 그 자체로 이미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상당히 고정된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2세기 첫 무렵의 교회 규범에 보면 벌써 13절에 예배를 마무리짓는 송영이 덧붙여 그만큼 더 길어진다.
 
이 송영은 다윗이 솔로몬에 의해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예물을 드리면서 올리는 감사기도: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역대상 29: 10-11)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는 이 송영이 신약성경의 나중 사본들에서도 마태복음의 주기도를 맺는 말로 나온다.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이를 마태복음 6장 13절 하반절에서 괄호 안에 넣었다.
 
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주권자 하나님에 귀속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인간 왕이거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로지 창조주와 섭리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귀속된다. 풍성한 성전 건축예물을 드리고 다윗이 감사기도를 드린 구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는 우주의 창조자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주권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왕이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그 정신이 되돌아 온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어귀도 이와 비슷하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 그리고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을 섭리를 계시받으면서 드리는 사도 바울의 송영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간구에서 송영으로 나아간다. 송영은 기도의 절정이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영혼의 찬양이다.(끝)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6/02/03 [14:18]  최종편집: ⓒ newspowe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
[김영한 박사] 트럼프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을 보면서 김영한 2017/12/13/
[김영한 박사] 젠더 이데올로기의 비판(IV 김영한 2017/11/14/
[김영한 박사]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점(III) 김영한 2017/11/01/
[김영한 박사] 성차별 철폐운동은 유사종교 운동 김영한 2017/10/17/
[김영한 박사]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I) 김영한 2017/09/28/
[김영한 박사] 나사렛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II) 김영한 2017/07/29/
[김영한 박사] 유진 피터슨, 성경의 진리성 부인 김영한 2017/07/20/
[김영한 박사] 나사렛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I) 김영한 2017/07/05/
[김영한 박사] <기고> '성공 아닌 섬김'을 복음 선교의 좌우명으로 산 조선인의 어머니 김영한 2017/05/15/
[김영한 박사]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II) 김영한 2017/04/27/
[김영한 박사]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I) 김영한 2017/04/03/
[김영한 박사]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 김영한 2017/03/16/
[김영한 박사] 탄핵정국이 한국사회를 보면서 김영한 2017/01/23/
[김영한 박사]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의 칭의(3) 김영한 2016/06/09/
[김영한 박사] "한국전쟁,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 범영수 2016/05/27/
[김영한 박사]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의 칭의(II) 범영수 2016/05/24/
[김영한 박사]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II) 김영한 2016/04/21/
[김영한 박사]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I) 김영한 2016/03/24/
[김영한 박사]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 김영한 2016/02/25/
[김영한 박사]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I) 김영한 2016/02/03/
뉴스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7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