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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3 [02:02]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
김명혁 목사(한복협 회장, 강변교회 원로) 설교문
 
김명혁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 그레이스 선교교회(2016.1.17) 로마서 12:1,2
▲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뉴스파워 범영수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8년 동안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거의 매주일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는데 매년 서 너 번씩 방문하는 교회는 그레이스 선교교회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선교교회는 2012년에 4번, 2013년에 4번, 2014년에 4번, 2015년에 3번 왔습니다. 오늘 2016년 새해 세 번째 주일을 맞아 그레이스 선교교회에 다시 왔는데 오늘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황은혜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정결한 신부로서 지녀야 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았으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 사람을 계속해서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계속해서 옷 입으라는 권면을 하고 또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6,7). “너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리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 속에는 옛 사람의 못된 기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고 그래서 여러 가지 부끄러운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라고 권면하고 또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1,2,11).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 마지막에 가서 구원함을 받지 못하게 될 불행한 사람들이 있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0,2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마25:1,2).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도 주님을 믿고 기다리던 예비 신부 신자들이었고 미련한 다섯 처녀들도 주님을 믿고 기다리던 예비 신부 신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는 행복을 누렸고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지 못하는 불행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두려움의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오늘 아침 설교의 내용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래서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은 주님의 예비 신부들이 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매우 중요하고 매우 심각한 내용의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은 말세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버림을 받게 될 엉터리 신자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세리처럼 자기를 낮추며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세리)이 저 사람(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18:14).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도 말세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버림을 받게 될 엉터리 신자들이 많이 생긴다고 경고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말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교회에 나가서 형식적으로 기도도 하고 형식적으로 찬송도 부르고 형식적으로 예배도 드리지만 근심 걱정 불평 불만 분노 증오를 몸에 지니고 불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서 반 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형식적인 엉터리 신앙생활을 계속하여야 하겠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힌 반 신앙적인 삶을 계속하여야 하겠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올바로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지니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인 예수님의 삶을 옷 입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마음을 지니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가룟 유다와 후매내오와 알렉산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날마다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옷 입을 수가 있습니까? 이제부터 그 비결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비결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은 우리 신자들의 삶의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정확하고 철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은 우리 신자들의 삶에 대한 지나친 비관주의적인 관점도 문제이고 지나친 낙관적인 관점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았어도 결국 죄만 계속해서 짓다가 망하게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적인 관점은 잘못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았고 그리고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과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제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거룩한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적인 관점도 잘못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에 대한 비관주의적인 관점과 낙관주의적인 관점을 아울러 받아드리는 종합적인 관점이 바람직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리켜 “Christian realism” 즉 “기독교적인 실재론” 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인 실재론”의 관점을 성 어거스틴과 존 스토트 박사님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받아드렸습니다. “기독교적인 실재론”의 관점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십자가와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종합적인 관점입니다.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 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어거스틴의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에 대해서 박사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오늘 너무 어려운 수준 높은 내용의 설교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수준 높은 내용의 설교는 사실 처음으로 하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선교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적인 삶과 사고의 수준이 아주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실재론”을 표명한 사람들의 조상은 다윗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갑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바라보면서는 통곡하면서 울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는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표명한 “기독교적인 실재론”을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고 웃고 또 웃었습니다. 삼층 천에 올라갔던 사도 바울이 그의 손수건이 닿기만 해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능력의 소유자였던 사도 바울이 자기 속에는 지금도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비관적으로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제가 매일 읽는 성경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저는 사도 바울이 자기 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고백을 하면서도 절망과 원망의 소리를 지르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보통 신자나 제자 같았으면 절망과 원망의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은 사도 중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자기 몸 속에 아직도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고백만을 하고 또 했습니다. 8장에서도 감사와 찬양의 고백은 이어지고 또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1-35).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의 몸 속에 선만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절절이 쏟아져 나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의인들의 몸 속에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감사의 고백이 절절이 쏟아져 나오지 못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이런 엄청난 고백까지 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0,21). 물론 그 다음 절에 조심스러운 경계의 말씀을 추가하기는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 주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우리 신자들의 몸 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나쁜 사실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고 세리와 창기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죄인들에 대해서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도 바울에게 약함과 부족함과 고난을 몸에 지니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그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적인 실재론”이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유익하고 얼마나 보배로운 관점인지 모릅니다. “기독교적인 실재론”의 유익함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큼 하고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선과 악을 함께 몸에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옷 입을 수가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옷 입을 수 있는 비결 세 가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비결은 날마다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사는 우리 구원함을 받은 죄인들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다윗과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바울을 본 받아서 날마다 울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분부하신 말씀과 제일 나중에 분부하신 말씀이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다윗과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바울은 맨날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1,8).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 맨날 울면서 회개와 사랑의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눅7:38). 일부 성경학자들은 눅7장에 나오는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요20:11). 사도 바울의 회개와 참회는 처절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12:5).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고후12:9). 우리들이 더러운 마음과 더러운 삶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을 옷 입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윗과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다윗과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맨날 울면서 회개의 고백을 했고 마지막 10일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처절한 회개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은 모두 맨날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을 옷 입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목사).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목사).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목사). “나는 고멜과 같은 음녀입니다”(김치선 목사).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목사). “나는 어릴 때부터 범죄를 계속한 불의하고도 불충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두렵게 떨며 울었습니다”(손양원 목사). “나는 신사 참배하는 죄인입니다”(한경직 목사).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목사).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회개를 강조했는데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니, 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새로워질 수 있는 첫 번째 길은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비결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닮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사람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고 생각하면 옛 사람이 살아나고, 새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새 사람이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3장과 12장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큰 바위 얼굴을 닮는 것처럼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조금씩, 조금씩 닮게 되고 그래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을 조금씩, 조금씩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도 요한처럼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닮게 되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조금씩, 조금씩 닮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에게로 와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막달라 마리아는 사죄와 구원의 주님을 만난 후 언제나 주님 곁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실 때 주님을 따르는 여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십자가 아래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무덤가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앞에 있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으니”(막16:40).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요20:11).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요20:16). 막달라 마리아는 언제나 주님 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예수님 닮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을 지니고 예수님만 순수하고 아름답게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이야말로 언제나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알지도 생각지도 못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말씀들을 가장 많이 가장 세밀하게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사도 요한은 물론 옛 사람의 흔적인 악을 자기 몸에 지니고 살았겠지만 밧모 섬에 붙잡힌 죄수로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생각하면서 옛 사람의 흔적을 거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고 주님의 말씀만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핍박자 사울도 예수님을 만난 다음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기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을 받을 정도로 예수님만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귀중하게 여기던 민족이나 가문이나 학문이나 종교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예수님에게 미쳐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미친 자기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를 이렇게 밝히며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한다고 안타깝게 고백하면서 평생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예수님만을 전하면서 예수님에게 미친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새로운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도 바울의 권면을 귀중한 권면으로 받아드리고 그 권면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라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보배로운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비결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도록 최선을 다할 때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새로운 방향과 목적으로 바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새롭고 보배로운 마음과 삶으로 바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은 어둡고 추한 삶으로 바뀌어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밝고 보배로운 삶으로 바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몸과 마음과 재물과 시간과 정성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로 드리는 일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1 2:2). 사실 기독교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열납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를 맨날 울면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고 다윗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시51:17).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이 드린 향유와 눈물의 제사를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기쁘게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드린 향유의 제사를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기쁘게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어린 소년이 오병 이어를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을 때 예수님께서 기뻐게 받으시고 축사하신 다음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자기의 몸에 지니고 자기를 돌로 치는 사울을 위해서 사죄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렸을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놀라운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나중에 자기들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고 로마 복음화의 거름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분들을 본 받아서 토마스 선교사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렸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수 많은 분들이 자기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재물과 시간과 정성과 생명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로 드리는 일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과 운명이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마음과 삶과 운명으로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다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착함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15,17,20). 사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이곳 저곳에서 여러 번 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39-45).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권면을 여기 저기서 계속해서 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8-10). 성부 하나님께서도 꼭 같은 말씀을 오래 전에 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놔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시10:17-19).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도움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긍휼과 위로와 착함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펼 때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들의 운명이 바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4-36,40).
 
오늘 설교가 너무 길어졌는데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선과 악을 함께 몸에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옷 입을 수가 있을까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 가지 비결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 비결은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사는 우리 구원함을 받은 죄인들이 다윗과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바울을 본 받아서 날마다 울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비결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닮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셋째 비결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착함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말씀을 축복하시고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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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1/19 [15:2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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