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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0.19 [09:04]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김영한
예수가 가르치신 기도: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
▲ 김영한 박사     ©김준수
 IV.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
 
하나님 나라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기도의 청원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하시며.”(마 6:10a)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지 삶의 목표를 제시해 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다. 역사적으로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고 사회적 평등을 무력과 독재와 인권유린으로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는 1989년 동구의 민주화와 그 종주국인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이라는 공간적 의미보다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내면 속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속에 머물지 않고 외면적으로 확산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비가시적인 통치적 실재는 내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와 헌신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 개인,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생태계, 우주 속에서 외면화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2. 복음주의적 이해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칼빈주의의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개인의 변화에만 집중하나 사회적 변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상의 억눌린 자와 불행한 자를 돌보는 일은 여태까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74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ent) 이후 복음주의는 복음전파와 사회적 참여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신앙적 발상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김영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신학적 성찰,” 「개혁주의 이론과 실천」,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편, 2014년 제6호, 11-49.) 이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인 칼빈주의자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칼빈주의적 이해
 
칼빈주의(calvinism)는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체계다. 칼빈주의는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the worldforming Christianity)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2nd ed. 1994; 홍병룡 역,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2007, 1장.) 칼빈주의는 부조리한 사회 질서와 구조를 개혁해서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개혁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사회적 불의에 의해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서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약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다. 이런 기독교라야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만다. 이것이 칼빈이 발견한 기독교였고 이것을 칼빈주의라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사회변화에 소극적 이었으나 그보다 26년 후에 태어난 칼빈은 적극적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는 어거스틴적이고 중세적인 회피적 기독교로서 내세 지향적이었다.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면화에만 주력했으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내면적 기독교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사회 구조 개혁에 힘을 쏟았다.
 
4, 신칼빈주의적 이해와 해방신학적 이해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인 기독교철학자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칼빈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사회변혁을 추구한 두 신학 사조를 탐색한다. 그것들은 칼빈주의를 보다 사회변혁적으로 변형시킨 신칼빈주의와 해방신학이다. 전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신학이요, 후자는 20세기 후반기 남미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주교회의 즉, 메데인 회의(1968년) 후 남미 카톨릭에서 유래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영향을 준 신학이다. 신칼빈주의(neo-calvinism)는 문화 개혁과 관련하여 우상숭배를 배척했고, 경제 성장을 궁극적인 선으로 취급하는 세계 체제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한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지배 및 착취와 관련하여 인간 해방을 주장하면서 탐욕과 권력욕에 추동되어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지배하는 세계 체제를 부조리한 구조요 죄라고 규탄한다. 해방신학의 시각에서 보면 신칼빈주의는 성장 우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전략은 제시하지만, 스스로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려고 싸우는 집단들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주의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평가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한계는 해방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보지 않고 지상의 이상향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는 결단코 인간이 구현하는 지상 위의 이상향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종말론적 단서(eschatological proviso)가 도외시 되었기 때문이다.(고범서 편역, 󰡔해방신학 논쟁. 기독교와 위기지 지상논쟁󰡕, 범화사, 1984, 63; 김영한, “제 8장 개혁주의 신학의 사회참여론,” in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1996, 777-780.)
 
5. 종말론적 이상향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사랑이 완전히 상호 일치하는 왕국이요 이상향이다. 이 이상향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서 단지 제네바의 신정정치, 영국 청교도들, 그리고 미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공동체 등에서 파편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사회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샬롬나비 운동(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 www.shalomnabi.com)은 시장논리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와 사회적 소외자들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권익을 조화시키는 사회적 기업을 추구하는 보수적 개혁주의, 열린 개혁주의의 시민운동(감사하며, 나누고 섬기자: 1. 힘써 일하고 범사에 감사하자. 2. 배려하며 함께 나누자. 3. 사랑하며 서로 섬기자)를 실천하고자 한다.(샬롬나비 2월 창간호, 2015년 1월, 개혁주의 이론과 실천, 2011년 창간호-2016년 제9호, 개혁주의이론실천학회 샬롬나비(편), 2016) 하나님 나라 도래는 종말론적 소망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 도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해 하나님이 땅에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도래에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분의 주권적 사역에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이사야는 말한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5-17) 종말론적 도래는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역사적 교회의 선교와 전도사역을 통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파편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나 종말론적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실현될 것이다.
 
V.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늘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 6:10b) 이 청원 기도 대목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 같이 우리는 기도에서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해야 한다. 주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와 그의 뜻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뜻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길로 나간다. 하늘이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늘이란 물리적인 위에 있는 우주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고 이루는 곳이다. 땅이란 인간이 사는 곳이나 인간의 역사(役事)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고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은 역사와 우주의 창조자요 주관자로서 높은 곳과 깊은 곳에 계신다. 하늘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세워지면 땅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분은 주권자로서 역사와 우주를 운행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주권적인 인격자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땅의 일에 무관하여 혼자 초연하게 낮잠을 즐기시는 자연신론의 신이 아니다. 그분은 우주와 역사를 이 순간에도 운행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스토아 철학의 신처럼 무한한 공간을 통해 어디에든지 존재하시는 물질적인 실체, 즉 전세계의 구석 구석에 침투해 있고, 끝없이 무한한 공간에 두루 퍼져 있는 큰 물질적 실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운명이나 자연의 맹목적 의지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와 우주를 초월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하시며, 그의 주권적인 뜻을 펼치시는 살아계시는 인격자이시다.
 
시편 기자는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에 관하여 다음같이 예언하고 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시편 예언이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9:9-10)
 
3.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오신 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분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인성을 지닌 자로서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러나 신성을 지닌 자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예수의 영혼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VI.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 6:11)라고 가르치신다. 우리의 육신은 오늘 하루를 사는 데 필요한 양식을 필요로 한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한 채 급박하게 출발했으나(출 12:39) 하나님께서는 40년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4b). 하나님은 광야길을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다.(출 16:32; 시 78:24)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시 111:5)으로 체험되었다. 양식이 끊이지 않고 풍부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사 51:14)을 의미하며, 양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겔 4:16)를 나타내기도 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서 무리들에게 설교하신 후에 빌립에게 이르신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b)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고 이들이 시장한 것을 아시고 허기(虛飢)를 면하도록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는 것은 2백 데나리온(신약 시대에 1 데나리온은 일군의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로마인들이 발행하였던 은전(銀錢)을 말한다) 떡도 부족하다고 빌립은 대답한다. 5천명을 베풀리 먹이려면 일꾼의 2백 일치 삯에 해당하는 떡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수와 제자들은 방랑 전도자들이기 때문에 먹을 것이 준비되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곤 한 어린 아기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2. 5병2어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
 
이에 예수님은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 6:9)를 축사하시어 오천 명을 먹이신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1-13) 우리가 가진 양식은 주변의 가난한 자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분량일찌라고 주변에 먹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때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와 무관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고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몫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가져온 지극히 작은 분량의 양식을 축복하시어 5천명이 풍족히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도록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은 어른도 아닌 한 어린 아이의 한 끼 식사를 축복하시어 5천명의 사람들이 베풀리 먹도록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메시야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기적이다. 5병2어의 기적이란 남을 놀라게 하는 마술적 기술이 아니라 5천명이라는 군중들이 돌아가는 도중에 쓰려질까 염려하여 사랑과 연민에 기초되어 작은 분량의 떡과 물고기를 축복하여 일어난 사랑의 기적이다. 진정한 메시야가 가져다 주는 기적이란 마술이 아니라 관심와 배려와 공감과 연민에 기초한 것이다.
 
3. 예수님은 생명의 떡

 
5병2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요 6:59) 자기에게 나아오는 군중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묻는 군중들(요 6:28)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이르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먹었던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요 6:13)을 소개하신다: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2-33). 군중들은 예수에게 “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간구한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떡이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혼을 살게하는 신령한 양식인 줄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떡을 달라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은 그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48-51) 유대인들은 “내 살을 먹어라”는 예수의 말에 대하여 곡해(曲解)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수군거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성만찬의 신비를 말씀하신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3-57) 예수의 이 말씀은 영적 신비: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um)를 가르치는 복음적 진리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 진리는 육신적 의미의 피와 살로 이해하지 않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4. 종말론적 메시지: 생명의 떡
 
예수님의 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 중 많은 무리들이 떠나갔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수많은 군중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요구했다. 군중들은 세상에서 번영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세상에서 정치적 메시야에 의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이러한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이제 열두 제자들만 남았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생명의 떡 교훈은 종말론적 메시지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인치신 인자가 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 메시지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인자로서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로서 영생을 주시는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manna)를 먹고 육신의 생명을 유지했다. 이는 옛 만나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주시는 새 만나를 약속하신 것이다. 새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인자, 즉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옛 언약을 상징하며, 이제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실 생명의 떡이란 새 언약을 상징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복음의 언약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5. 신자유주의의 세상 경제 질서에 대한 대안: 사회적 자본주의
 
우리의 육신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풍요한 양식이 아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가르침이다. 20세기 후반기부터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세계는 더 가진 나라와 덜 가진 나라 사이의 불균형이 생기게 되었다. “세계 체제(World-System) 분석”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 사회학자 임마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1930-)에 따르면, 근대 세계 체제의 주된 특징은 여러 국가와 다양한 민족이 점차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 하나로 여지없이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미와 북서부 유럽과 일본이라는 중심부가 반(半)주변부나 주변부 국가들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 있다. 세계가 발전하지만 많이 가진 국가그룹들이 덜 가진 국가그룹들을 지배하고 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관계에서도 탐욕과 욕심이 지배하고 있으며,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경제가 발전하나 진정한 세계의 갈등은 해결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11년 10월 전세계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 시위가 전세계 도시를 뒤흔들었다. 10월 15일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은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시작으로 서울과 도쿄 등 아시아 도시를 비롯해 런던·베를린·마드리드 등 유럽 도시, 뉴욕 월가와 맨해튼 등 아메리카 대륙에도 분노한 99% 의 ‘보통사람들’의 외침이 거리로 쏟아졌다. 실제 다양한 요구를 지닌 시위대를 결집시키는 것은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이란 구호다. 영국 런던의 한 시위자는 “이젠 충분하다. 우리는 대기업과 은행 시스템의 이해에 기반하지 않은 진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외쳤다. <뉴욕 타임스>는 언어와 지형, 규모 등이 다 다름에도 시위대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에 대한 좌절로 ‘뭉치고 있다’고 주목했다.(“1%위한 사회 바꾸자” 세계 동시시위, 등록 :2011-10-16 19:56 수정 :2011-10-16 22:35 한겨레, 이정애 박태우, 브뤼셀/이본영 기자, 뉴욕/권태호 특파원 hongbyul@hani.co.kr)
 
한국에서도 최근에 기독교 기업으로 알려진 이랜드 사태가 불거지자 싸잡아 기독교도 함께 욕먹었다. 자유방임적 자본주의(Laissez-faire capitlaism) 사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우호적으로 볼 수 있는 신학 논리가 매우 빈약했다는 점이다. 소외자와 약자에 대한 권리를 시장 논리로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진 자들이 덜 가진자들을 배려하고 이들과 나눔으로써 상생하도록 하는 사회적 자본주의(social capitalism) 이론이 요청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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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1/18 [06:3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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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박사]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의 칭의(3) 김영한 2016/06/09/
[김영한 박사] "한국전쟁,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 범영수 2016/05/27/
[김영한 박사]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의 칭의(II) 범영수 2016/05/24/
[김영한 박사]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II) 김영한 2016/04/21/
[김영한 박사]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I) 김영한 2016/03/24/
[김영한 박사]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 김영한 2016/02/25/
[김영한 박사]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I) 김영한 2016/02/03/
[김영한 박사]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I) 김영한 2016/01/18/
[김영한 박사] 주기도문(Vaterunser) 해설(I) 김영한 2016/01/07/
[김영한 박사] 大道無門의 독실한 신앙의 지도자 김영한 201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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