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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2.20 [18:05]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회장) 설교문
 
김명혁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수원 예향 성결교회(2015.12.13)
빌1:1-11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제가 작년 즉 2014년 12월 7일 주일 수원 예향 성결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오전 11시 예배 시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오후 2시 예배 시간에는 “안디옥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5년 12월 13일 주일에 예향 성결교회에 다시 와서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일경 목사님이 “새해의 각오와 결단”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에 대해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해의 각오와 결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교회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교회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제일 좋아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이후에 이방에 세워진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안디옥교화와 빌립보교회였는데 빌립보교회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사모하고 가장 사랑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빌1:8)고 고백했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나의 사랑, 나의 사모,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 이라고 불렀습니다(빌4:1).
 
빌립보교회에는 사랑의 “교제”가 충만했고 사랑의 “봉사”가 충만했고 그래서 사랑의 “기쁨”이 충만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봉기”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제가 1980년 4월 6일 청담동에 교회를 세우면서 교회 이름을 강변교회라고 지은 이유는 강변에 세워졌던 빌립보교회를 닮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변교회의 표어를 “서로 돌아보고 기쁨으로 섬기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교제”와 “봉사”에 전력한 교회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이방인 교회였던 빌립보교회의 특징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교제”와 “봉사”와 “기쁨”이 충만한 즉 “교봉기”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첫째로 빌립보교회는 사랑의 “교제”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5).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4). 빌립보서에 “교제” 라는 말과 “참예” 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교제” 라는 말과 “참예” 라는 말이 비슷한 말이면서도 조금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제”는 가벼운 만남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예”는 보다 깊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서로 나누는 sharing 의 교제를 의미하고 어떤 일을 함께 하는 partner-shipping 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서 무슨 일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복음과 은혜 안에서 서로 “교제”했고 바울의 고난과 선교 사역에 “참예”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과 루디아와의 “만남”과 “교제”와 “참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청종했고 지갑과 물질과 집을 열어서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참예”했습니다(행16:15). “교제”가 친밀한 교제가 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하고 지갑을 열어야 하고 집을 열어야 하는데,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었습니다. 루디아의 “교제”와 “참예”는 형식적인 만남과 교제가 아닌 실제적인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루디아의 본을 따라서 모두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교회 신자들은 방관자들이 아니었고 구경꾼들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도 바울의 목회 시역과 선교 사역에 “참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빌1:7).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4:14,15). 여기 “참예” 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빌립보교회는 기도와 물질뿐 아니라 몸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에 “참예”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교인들 중에서 한 사람을 대표로 뽑아 로마로 보내어 빌립보교회 신자들의 소식과 사랑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참된 사랑은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고 몸으로 돕고 싶어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로마로 갈 사람을 정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성품이 부드럽고 착하고 충성스럽고 희생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만나면 위로를 받고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편지와 사랑의 선물을 가득히 담은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수 천리 바다 길을 항해한 후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사도 바울에게 뜻하지 않은 반가운 손님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꿈에도 그리며 사모하고 보고 싶어하던 빌립보교회 신자의 한 사람인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4:10).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빌4:18). 빌립보교회는 사랑의 “교제”가 충만한 교회였고 사랑의 “참예”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가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닙니다. 수원 예향 성결교회가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를 힘쓰므로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봉사”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고난에 참예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참예한 것을 가리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봉사”와 “섬김”의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교제”와 “참예”가 실제적이 될 때 “교제”와 “참예”는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참예”는 곧 “봉사”입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을 바쳐서 주님의 일에 “참예”하는 것이 곧 “봉사”요 “섬김”이요 “착함”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 “너희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리라”(빌2:17).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2:30). 여기 “착함” “봉사” “섬김” 이란 말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과 에바브로디도가 주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면서 자기들의 생명을 돌아보지도 않은 것을 지적하면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착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믿을 때부터 착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면서 마지막 때까지 착한 일을 계속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 사실 “섬김”과 “착함”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착함”이 충만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착함”이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닙니다. 수원 예향 성결교회가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착함”을 힘쓰므로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가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의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 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1:3-5).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빌4:10). 빌립보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쁨”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강해설교자인 제임스 보이스 박사는 빌립보서 강해서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빌립보서는 성경 중에서 기쁨이 가장 충만한 책입니다. 빌립보서 전체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기쁨과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짧은 네 장을 통하여 열 여섯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자족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어떠한 처지에서도 기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에게서는 기쁨이 넘쳐 흘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참 근원을 찾아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 안에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과 곤란의 기쁨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이와 같은 기쁨은 사도 바울의 가슴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가슴 가슴에도 전염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는데 그때 그 기쁨은 간수에게 전염되었고 루디아에게 전염되었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전염되었을 것입니다. 로마 옥중에서의 사도 바울의 기쁨의 비결은 환경이나 소유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었던 것이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 안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4:10). 로마 옥중에서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기쁨과 승리는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대로 전염되었고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환난과 시련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처럼 기뻐하면서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마게도니아 지역에 있던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고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기쁨”이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닙니다.
 
사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다윗도 솔로몬도 기쁨을 최고로 예찬했고 기쁨을 간구했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90”14). 모세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16:3).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3:12,13). 솔로몬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기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25:21). 수원 예향 성결교회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마무리하기 전에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주님 안에서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과 성도님들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아오게 된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저는 허물과 죄가 너무 많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한 평생을 비교적 "기쁘고 즐겁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11살 때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면서 살기 위해 부모님을 평양에 두고 혼자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와서 한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고 슬프게 살아왔지만 저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한 평생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다 벗어 버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긍정적으로 낙천적으로 소박하고 여유롭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북에 두고 38선을 혼자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을 느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덕을 넘고 파밭을 지나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서 남쪽에 도착했습니다. 약간의 “스릴과 즐거움”도 느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이모님을 만나 이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리고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 새벽기도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주일성수를 범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아와 나그네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서울중학교 사울고등학교 서울 대학교를 다니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의 친구들은 제가 부모 업는 고아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대학생 시절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군대에 가서 군 생활도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그것이 힘이 들어서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논산에 가서 훈련을 받을 때 밧 줄을 타고 높은 곳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밧줄을 타고 타잔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훈련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저는 한 번 하고 다시 돌아와서 두 번씩 하곤 했습니다. 총 쏘는 것도 포복 훈현을 받는 것도 모두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7사단에 가서 군 생활을 하면서 군법에 벗어난 일도 했지만 아주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저는 12년 동안 미국에 가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노동을 했는데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마루 청소, 화장실 청소, 인쇄소 일, 도금 공장의 일, 접시 닦기, 페인트 칠하기, 정원 가꾸기, 판매원 일 등등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집을 페인트 하는 일과 정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뜨거운 여름 날 땡 볕에서 집 안과 밖을 페인트 칠하는 일과 풀을 깎고 화단을 정돈하며 정원을 가꾸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페인트 칠과 정원 가꾸는 일을 하면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낡은 집이 깨끗한 모습으로 바꾸어 지는 것을 바라볼 때 나는 아주 재미가 있었습니다. 흐트러져 있던 정원과 화단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붙잡혀 가서 협박을 당하는 황당한 일도 있고, 도둑 맞는 힘 든 일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픈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고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저는 귀국 후 얼마 후에 남산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심문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를 느꼈습니다. 주일성수를 방해하는 군사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붙잡혀 갔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밤 늦게까지 심문을 당하고 아침에 풀려나오면서 저는 약간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하면서 두 번 도둑을 맞고도 걱정이나 당황을 하지 않았습니다. 암스텔담 역에서 제가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을 어느 도둑이 빼앗아 가지고 도망을 갔는데 그 가방 안에는 여권과 미국 비자와 카나다 비자와 비행기표와 여행자 수표와 작은 카메라와 성경책과 기행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행문을 잃은 것이 제일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걱정이나 당황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만에 여권과 미국 비자와 카나다 비자와 비행기표를 다시 만들 수 있었고 며칠 후에는 여행자 수표를 다시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미국 휫튼 복음주의대회와 룩셈부르그와 빠리와 니스 여행과 제네바 WCC 본부 방문과 알프스와 튜빙겐과 하이델베르그 여행과 암스텔담 전도대회에 대해서 썼던 장문의 기행문을 잃어버려서 너무너무 아쉬웠었는데 기억을 더듬으면서 다시 썼을 때 거의 99%의 내용을 기억하며 다시 쓸 수가 있어서 저 자신이 너무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는 나중에 혼자서 웃으면서 도둑 맞은 일을 “재미있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어린 아들 철원이의 불치의 병과 죽음을 통해서 많은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저는 그 아픔과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도 맛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철원이의 모습에서 보석과 같은 믿음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었고, 슬픔과 아픔과 고통너머의 천국의 평화를 바라보며 천국을 사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철원이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인해서 고난의 의미와 천국의 평화를 바라보면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목회는 평생토록 “기쁘고 즐겁게” 했고,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캄캄한 밤에 혼자서 뚫고 넘어가면서도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북한을 정식으로 두 번 방문했을 때도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비판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어떤 형편에 처할 찌라도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두려움과 놀람 대신 “모험심”과 “담력”과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고 당당하게 뚫고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의 “기쁨”과 “즐거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이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가 충만한 교회였고,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착함”이 충만한 교회였고, 그리고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랑의 교회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주고 받는 교회였고, 사도 바울로부터 사랑을 주고 받는 교회였고,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주고 받는 교회였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주고 받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수원 예향 성결교회가 주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주고 받는 아주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향 성결교회가 사랑의 “교제”와 사랑의 “참예”가 충만하고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섬김”이 충만하고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즉 “교봉기”가 충만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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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08 [08:5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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