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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3 [10:13]
메르스와 가뭄이 함축한 신학적 의미(I)
염병과 재난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경고의 언어
 
김영한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목차-
I. 사회적, 자연적 재난에 대하여 현대판 이신론적, 이분법적 해석 내지 협착한 세대주의 해석
II. 자연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 주어지는 “원계시”로서의 하나님의 언어
III. 염병과 사회적 재해는 하나님이 사회에 주시는 경고 언어
IV.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나 진노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
▲ 김영한 박사     ©뉴스파워
머리말
 
우리 사회가 지난 2003년에는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증후군)는 방역대책을 신속히 함으로 잘 막아 내었으나 올해 2015년에는 그 보다 약한 바이러스인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에 대해 초동대책을 잘 못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이 한 달 이상 메르스 바이러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중국관광객 등 해외관광객들의 무더기 예약 취소가 빗어지고 사회각계의 성장지표가 하락하는 등 작년 세월호 참사에 이어서 우리 사회가 잇단 재난을 겪으면서 온 사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가뭄사태가 영향을 주어 올 여름 소양강댐의 저장 수치가 가장 낮은 양을 기록하는 등 장마가 왔으나 남부와 일부 지역에 해갈을 했으나 아직도 특정 지역은 심한 가뭄으로 재난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나 일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까지 이 모든 재난은 우연히 온 것이고 모두 인재(人災)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대세다. 필자는 이는 세속적인 세계관이요,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손길에 대하여 영적으로 무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인간이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를 통하여도 그의 섭리를 나타내시는 세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I. 사회적, 자연적 재난에 대하여 현대판 이신론적, 이분법적 해석 내지 협착한 세대주의 해석
 
우리 사회에 다가와 두려움을 일으키고 확산되는 허약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전염병의 창궐과 유래 없는 극심한 가뭄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째, 이신론(理神論)적 해석이다. 이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뒤에는 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17세기에 일어난 계몽주의에 영향받아 18세기 영국에서 널리 유포되고 현대에까지 영향을 주는 사상이다. 이 해석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이 세상과정은 자연법칙의 과정에 맡겨두셨다는 것이다. 이신론은 창조주 신을 인정하나 이 세상을 섭리하고 주관하시는 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신론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삶에 간섭하는 인격 신이 아니다. 이에 반해서 모세가 증거한 열조의 하나님은 스데반이 증거한 열조의 하나님으로서 열조들이 나그네로서 가든 어떤 곳에서 함께 동행하시고 저들을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둘째, 이분법적 해석이다. 이는 메르스와 가뭄을 단지 인재(人災)로만 간주하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메르스 파동에 구태어 신앙적 해석을 가미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다. 메르스는 중동을 여행하다가 감염되어 돌아온 최초 환자(1번)를 격리조치하는 것에서 실패함으로써 전염이 확산(35번. 141번...)되었기 때문에 구태어 신앙적이고 신학적 해석을 메르스 파동에까지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다. 신앙과 과학을 이분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해석가능한 것에 구태어 신앙을 개입시켜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미신적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고 본다. 메르스 확산은 초등방역의 실패라는 인간의 실패에서 설명하고, 메르스는 중동지역에서 발생한 전염병인데 우리 방역 당국의 초등 방역실패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소양강 댐 최저 저축량을 기록하는 중북부 가뭄도 저수지 사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그리고 4대강 사업이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되지 못하고 그리고 고지대의 농촌에 물을 대는 저수지 사업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가뭄이 왔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저수지 사업을 제대로 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해석하는 사고다. 이런 인재(人災)는 하나님의 간섭이나 섭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구태어 이런 인재에 대하여까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신앙과 과학을 분리시키려는 사고가 강하게 들어 있다.
 
세째, 세대주의 해석이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로지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적용시키는 협착한 사고다. 하나님 사역을 이스라엘과 교회에만 제한시키는 협착한 해석학적 사고가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에게 있다. 전염병이나 가뭄이라는 자연 재해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순종한데서 비롯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해는 하나님의 선민인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오늘날 이방 사회인 한국사회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다. 세대주의 해석은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키고 구속사를 이스라엘과 연관시켜 해석하고자 하는데 그 일면성과 협착성이 있다.
 
이러한 세가지 해석은 역사와 자연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경적 하나님을 어느 특정한 세속적 이데올로기(이신론, 인본주의) 내지 신앙과 의학기술을 지나치게 분리시키는 이분법적 사고, 아주 협착한 신앙적 사고(신구약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구약 이스라엘에 집중하는 세대주의)에 제한시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세 가지 해석에 대하여 필자는 반대하면서 전염병과 자연 재해를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이들 자연과 사회 재해(災害)현상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경고의 언어로 조심스레이 해석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염병과 가뭄의 재난이 발생하는 사건의 총체 과정을 인간의 사소한 준비소홀과 실수까지 포함하여 이러한 재난을 자연과 사회적 복합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와 관련하여 깊이 성찰해 보는 것이 바른 성경적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어거스틴이 말한 바같이 세속사라는 보편사와 구속사라는 특별한 구원의 역사를 동시에 주장하시는 넓고 오묘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서 계시해주시는 분이시나 성경 속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만사를 그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서 간섭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그가 강조한 보편사를 주장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판넨베르그는 신정통주의자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협착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만을 강조한 것에 대하여 자연과 역사에서 자신을 근원적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를 강조하였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알타우스는 교회와 그리스도 계시 외에 인간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원계시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II. 자연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 주어지는 “원계시” 로서의 하나님의 언어
 
1. 알타우스의 원계시 개념
 
20세기 독일 엘랑엔대의 루터교 신학자였던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바르트가 제시한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변증법적 계시개념의 일방성과 편협성에 대하여 자연과 역사의 근원적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넓은 계시이해인 “일반적 계시”(allgemeine Offenbarung) 개념을 제시한다. 알트하우스는 이러한 계시개념에 의해 하나님을 역사나 자연과정과 동일시하는 역사적 범신론이 파악하듯이 계시를 단지 인간적 이성적 활동이라는 문화적 차원으로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나타나는 초월적 하나님의 자기증시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알트하우스가 제시하는 “일반적 계시”란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현실에 근원적으로 항상 현재적인 하나님의 자기증언”을 말한다. 이러한 근원적으로 항상 현재하는 하나님의 자기증언을 알트하우스는 그의 독특한 용어인 “원계시”(Uroffenbarung)라고 개념화 시킨다(Paul Althaus, Die Christliche Wahrheit, Gütersloher Verlaghaus, 1972, 61-76)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전 인간의 역사적 현실(언어, 종교, 질서, 선, 진, 미, 의(義)의 규범, 자연, 역사…)은 곧 “신 형상적”(theomorph)인 신적 현실을 증거한다. 이러한 신의 자기 증언으로서의 원계시는 소극적으로는 복음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을 죄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는 복음에 대한 신앙을 성취로서 규정한다. 그러나 원계시는 자연적 인간들에게 결코 “중립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순간 자연적 인간 안에서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변모 내지 부패해 버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근원적 계시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나라에서 샤마니즘과 미신이나 그릇된 제사 등으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적 인간에게 “은폐된 것”(Verborgenheit)으로 변모되어 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59.).
 
알타우스에 의하면 하나님 계시가 우상숭배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현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를 변명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은 항상 원계시 앞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원계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지각하게 하나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이 원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구원의 계시”(Heilsoffenbarung) 속에서만 성취된다. 원계시는 하나님의 근원적 자기 증거이긴 하나 불투명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자는 이를 해석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원계시는 비로소 계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는 이 원계시와 구원계시 사이에 적극적 관계를 수립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의해서 원계시는 인간에게 바른 양식으로 인식된다. 알트하우스는 이것을 “재(再)인식”(Wiedererkennen)이라고 부른다.
 
2. 브룬너의 창조계시
 
알타우스가 제시한 원계시란 개념은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이 제창한 일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면서 이를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하였다.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이러한 착상을 이어 받아 창조계시(Schöpfungsoffenbarung)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계시 외에 인간의 양심과 자연과 역사에서 근원적으로 자신을 증시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에게로 소급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당시의 문화인 로마인들에게 다음같이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말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자기들에게 있기 때문에 핑계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8-19).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 보인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핑계하지 못한다고까지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 때 세상의 불신자, 미종족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어와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음을 이 구절은 준엄하게 말해주고 있다.
 
원계시가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구원의 계시도 바르트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구원의 계시는 인간의 전 현실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원계시를 전제한다. 구원의 계시가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인간의 전 현실 속에서 성취되는 것은 이미 역사와 세계 속에 항상 근원적으로 현재하는 하나님의 원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계시는 복음 안에서의 원계시의 활성화이다.
 
알타우스는 1930년대 독일 히틀러 통치 시절에 나치의 등장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고 히틀러의 등장을 신학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원계시 신학은 어용신학이 되어 버렸다. 이는 당시 철학계에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라는 세기적인 저서를 1928년에 출판함으로써 철학계에 “존재의 사고”라는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독일 프라이부르그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치 등장을 지지한 알타우스의 역사적 오류는 하이데거의 오류와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 원계시 개념은 1930년대 독일 나치어용 신학자들이 천명한 아리안 민족의 신화를 독일민족의 혈통적 우월성 이데올로기로 격상시키면서 유대인을 인종차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원계시 개념의 적용을 정치적으로 한 것이지 원계시 개념 자체가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원계시 개념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긍정적으로 시사하는 점은 자연과 역사를 통한 인간의 근원적 현실에서 한 인간과 사회가 부딪치는 근원적인 숙명(8.15 해방, 6.25 전쟁, 4.19 혁명 등)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의 집단행동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자기증시를 드러내 준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원계시 개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일어난 메르스와 가뭄 사태를 신앙적으로 이해하는 데 하나의 해석의 측면을 제시해주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번에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메르스 사태와 유래없는 가뭄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라고 신앙과 관련없는 것으로 일축(一蹴)하기 보다는 오늘도 우리 사회의 근원적 현실 가운데 보이지 않게 그의 주권적 방식으로 활동하시고 우리 개인과 사회의 갈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 조심스레이 신앙적 교훈을 찾아보는 것은 신학자, 목회자와 신자의 신앙적 성찰의 겸허한 자세라고 사료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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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7/01 [21:2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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