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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9.23 [18:01]
이만열 박사 "참 스승 김교신 선생
다산연구소 ‘실학산책’에 김교신 선생에 대한 글 기고
 
김다은
 이만열 박사(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4월 25일 70주기를 맞은 김교신 선생의 ‘성서 조선’에 대한 글을 1일 다산연구소 실학산책에 기고했다.
▲ 이만열 교수     ©뉴스파워
 이 박사는 기고문에서 “선생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학자였고, 교회 시무도 하지 않았지만 참된 목자였고, 일제의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버리지 않고 미래에 투자한 교육자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독립 ‘투쟁’을 벌인 적이 없지만 불굴의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였다.”며 “교단에서 조선말 쓰기를 고수하려다 두 번이나 학교에서 물러났고,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자녀들까지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교회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생은 그의 동지들(송두용, 양인성, 유석동, 정상훈, 함석헌)과 함께 ‘성서연구회’ 및 『성서조선』을 통해 ‘성서를 조선에’,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 한 신앙인이었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의미의 ‘조선적 기독교’ 혹은 ‘조선산 기독교’ 운동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선생은 성경연구를 통해 형해화되어가고 있던 기성교회를 개혁하고 그 틀과 제도를 벗어나려 했다 해서 ‘무교회자’로 불리기도 했다.”며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지만, 자기의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가 김교신”이라고 밝혔다.
 
김교신 선생을 “복음 신앙과 민족 사랑을 배우고 실천한 이”라고 소개한 이 박사는 “김교신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저술들을 탐독했고 그의 성경연구모임에도 참석하여 복음 신앙과 민족 사랑을 동시에 배웠다.”고 밝혔다.
 
이어 “선생 스스로 “나는 우치무라 선생으로부터 애국과 복음을 배웠다”고 말했을 정도다. 2J(Jesus for Japan)로 표현된 우치무라의 애국심은 그때까지 내연되고 있던 선생의 애국심을 격발, 고양시켜 뒷날 김교신의 2C(Christ for Chosen)가 발현되었다.“며 ”그는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라야만 진정한 민족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
 
지난 4월 25일은 김교신 선생 70주기였다. 선생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학자였고, 교회 시무도 하지 않았지만 참된 목자였고, 일제의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버리지 않고 미래에 투자한 교육자였다. 그는 독립 ‘투쟁’을 벌인 적이 없지만 불굴의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였다. 교단에서 조선말 쓰기를 고수하려다 두 번이나 학교에서 물러났고,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자녀들까지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
 
교회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생은 그의 동지들(송두용, 양인성, 유석동, 정상훈, 함석헌)과 함께 ‘성서연구회’ 및 『성서조선』을 통해 ‘성서를 조선에’,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 한 신앙인이었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의미의 ‘조선적 기독교’ 혹은 ‘조선산 기독교’ 운동을 주장했다. 선생은 성경연구를 통해 형해화되어가고 있던 기성교회를 개혁하고 그 틀과 제도를 벗어나려 했다 해서 ‘무교회자’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지만, 자기의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가 김교신이다.
 
복음 신앙과 민족 사랑을 배우고 실천
 
김교신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저술들을 탐독했고 그의 성경연구모임에도 참석하여 복음 신앙과 민족 사랑을 동시에 배웠다. 선생 스스로 “나는 우치무라 선생으로부터 애국과 복음을 배웠다”고 말했을 정도다. 2J(Jesus for Japan)로 표현된 우치무라의 애국심은 그때까지 내연되고 있던 선생의 애국심을 격발, 고양시켜 뒷날 김교신의 2C(Christ for Chosen)가 발현되었다. 그는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라야만 진정한 민족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선생은 1922년 4월 처음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그 이듬해 동식물학·광물지질학 및 지리학을 망라한 지리박물과로 옮겼다. 조선을 더 섬기기 위해서다. 지리박물학 교사로서 선생은 조선의 대형지도를 걸어놓고 지리수업을 진행했고, 양정학교 교사 시절에는 ‘산에 물에’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을 데리고 조국 강산을 주유했으며, 서울 근교의 북한산 기슭을 산책하며 계곡이나 백합화를 볼 때조차 흐느껴 울었고,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소개하며 후진들에게 조국 사랑과 민족애를 성숙시켜 갔다. 그런 교육자였다.
 
『성서조선』은 16호(1930.5)부터 선생이 주필로서 집필․교정․인쇄․우송 등 사무일제를 전담하여 ‘조와(弔蛙)’로 폐간되는 158호(1942.3)까지 계속했다. 『성서조선』은 조선에 성서를 주어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는, 성서입국(聖書立國)을 지향했다. 그가 추구했던 무교회운동은 기성 교회가 형해화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무엇보다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보려고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원어로 성경공부하는 데에 열심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일제강점말기 선생은 『성서조선』을 통해 예언자의 소리를 발했다. 조선인 전향자들과 언론들이 일제 정책에 순응하여 전쟁열을 부추기며 거짓된 보도를 일삼자 선생은 공개 일기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근래의 신문기사는 한번 조판해 놓고 매일 날짜만 박아 발간하는 듯 어제나 오늘이나 천편일률. 3면 기사고 사설이고 기억력이 약한 우리로도 모조리 암송할 수도 있으리만큼 일색이다. 예전 같으면 … 각자의 오리지날리티가 있었고 각자의 체취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데서도 이를 볼 수 없다. 요즘 라디오에 들을 것이 있다면 일기예보쯤인데 그거나마 태반은 거짓말 방송이다”는 것이다. 오늘을 두고 하는 말로 착각할 정도다.
 
그리스도 복음에 의해 신생한 조선인
 
1930년대 후반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육자의 양심으로 조선어로 교육하지 말하는 총독부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다. 12년간 재직하며 손기정 등을 키웠던 양정학교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9월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에 잠시 부임했으나 역시 일제의 동화정책에 순응할 수 없어 곧 사직하고 이듬해 7월,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갔다. 이때 만월대 뒤편 송악산 폭포 밑 웅덩이 옆을 새벽기도 처소로 삼고, 새벽 4~5시경에 그곳으로 가서 냉수마찰을 하고 폭포소리에 대항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그 혹한에도 폭포 밑 웅덩이에 살아남은 몇 마리의 개구리를 보며, 선생은 “아! 전멸을 면했구나!”라는 ‘조와’의 글귀를 민족의 부활과 연관시켜 남겼다. 『성서조선』사건은 이렇게 터졌다.
 
『성서조선』사건으로 1년여 옥고를 치렀다. 그때 그를 취조한 형사는 “네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온 조선놈들 중에서 가장 악질분자다 … 네놈들은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조선 민족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 년 후, 아니 5백 년 후에라도 독립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으려는 악질분자다”고 했다. 선생의 중심을 꿰뚫어 본 독백이다. 출옥한 그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 “징용으로 각지에 흩어지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수천 동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조선인의 긍지를 살리기 위한 교육과 훈련에 힘쓰는 한편 동포노무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당시 유행하던 발진티푸스 감염환자를 간호하다가 그 자신이 감염되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해방 4달을 남긴 채 타계했다.
 
우치무라의 제자로 일본 무교회주의자이며 동경대학 교수였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가 있다. 그는 재직 중 1937년 반군․반전을 주장하다가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해방 후 동경대 총장으로 활동했다. 그가 1940년에 김교신의 초청으로 조선에 와서 강연하며 교제를 나눈 바 있는데, 김교신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편집한 『가신(嘉信)』1945년 9월호에 김교신을 애도하는 다음 글을 남겼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사람’으로 불리운 것처럼 김교신 씨는 참 조선인이었다. 씨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민족을 사랑하고 조선말을 사랑했다. 그러나 씨의 민족애는 고루한 배타적인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씨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신생한 조선인이었다. 온유, 근면 등 조선인으로서의 생래(生來)의 도덕이 씨에게는 믿음에 의해 한층 순화되어 있었다. 씨는 그리스도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애국을 삼았다. 미국식의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고, 불신앙의 소련 공산주의도 아니고, 더욱 세속적인 민족운동도 아니고, 권력자에 대한 영합, 협조도 아니고 순수한 무교회의 복음신앙에 의해 조선인의 영혼을 신생시키고 이를 자유와 평화와 정의의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씨는 그 귀한 일생을 바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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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5/01 [09:3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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