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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12.13 [23:14]
사선을 넘어 스위스에서 30년 사역을!
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인터라켄교회를 섬기는 김정효 선교사
 
스위스 바젤=김철영
1983년 2월, 총신대학원을 졸업한 한 젊은이가 스위스 땅을 밟았다. 수차례 사경을 헤매는 고통을 겪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스위스 땅을 떠나지 않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전북 임실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을 닮은 어머니 품 같은 스위스에서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상처 받은 영혼들을 보듬고 있다. 그가 김정효 선교사다.
▲ 바젤한인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김정효 선교사     ©뉴스파워

주일예배 겸 2012유럽성시화순회대회가 열린 스위스 바젤한인교회에서 만난 김정효 선교사의 첫 인상은 순박한 시골의 농부와 같은 착함과 어진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김 선교사는 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인터라켄에 있는 인터라켄쉼터교회 등 세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역시 순박한 이미지의 최옥순 사모가 늘 함께 했다. 최 사모의 고향은 전남 함평. 간호사로 일하면서 김정효 선교사의 곁에서 묵묵히 사역을 뒷바라지해왔다.

김정효 선교사가 스위스 땅을 밟은 것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착한지 두달만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런 두통이 몇일 계속된 후 마침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은 것은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뇌출혈로 진단했으나 정밀검사를 통해 머리속게 성인 손바닥만큼이나 큰 종양이 자라고 있음이 밝혀졌다. 당장 수술대에 누웠다. 그때 김선교사를 수술한 의사는 신경외과분야에서 세계 제 1인자로 인정받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종양이 너무도 커 종양 제거수술은 열두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리고 수술후 닷새만에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 그 닷새동안 사경을 헤메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나보니 꼼짝달싹도 못하는 반신불수가 되어있었다. 대소변도 일일히 남이 받아내야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졌다. 그렇게 삼년간의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고통과 슬픔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어느정도 거동이 자유롭게 되어지자 그는 자신이 수술받은 병원의 직원으로 어렵게 취업을 했다.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밀린 치료비때문이었다. 그간의 치료비가 엄청났다. 다행히 대학병원 수술실 책임자의 배려로 수술실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아내도 같은 대학병원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두사람의 수입은 한가정이 풍족하게 생활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그런데 그런 세월도 잠시였다. 밀린 치료비 다 갚고 그동안 쌓인 빚 다 갚고 이제 좀 살만하다 할 즈음에 귀 뒤쪽이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뇌피와 기까운 쪽의 뼈에 염증이 퍼진 것이다.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삼일 간격으로 응급실을 찾아야 할 만큼 극심한 것이었다. 세차례의 수술이 행해졌다. 그러나 수술은 매번 실패였다. 그렇게 또다시 삼년간의 투병생활이 계속되어졌다. 그 와중에 많이 회복되어졌던 왼쪽 마비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기간 동안 병원일은 할 수 없었다. 치료기간이 길어지고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젠 직장에서도 쫒아내기 위해서 많은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 상태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위와 십이지장에 많은 궤양이 생겨 밤낮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다. 머리의 통증과 복부의 통증이 얼마나 심했든지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극심한 통증때문에 이틀사흘 간격으로 응급실을 찾는 김 선교사는 병원에서 소문난 환자가 되어버렸다.

담당의사는 다시한번 수술을 받도록 권고했지만 그간의 과정으로 봐서는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거부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또 한번의 수술은 결국 직장에서 퇴출되어지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이때부터 금식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금식기도를 많이 한다. 한번에 이십일 금식기도도 했고 지금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금식기도를 한다. 그때 병을 앓으면서 갖게 된 습관이다. 그때 그 기도는 단순히 병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죽더라도 주님위해 일하다 죽을 수 있도록 일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어요. 병의 증상으로 봐서는 전혀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고 결국은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마침 바젤에 사시는 조옥자 권사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바젤에는 목사님이 안 계시니까 김목사님이 오셔서 사역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시더군요. 다음주일 즉시로 바젤로 갔습니다. 가보니까 두분이 앉아계세요.조옥자 권사님과 그분의 따님이신 공성희 집사님이었습니다. 바젤한인교회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단 두사람의 교인이었지만 시작하고 나니 힘이 생겨요. 그래서 이일 하다 죽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김 선교사의 건강상태는 마냥 두고 볼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담당의사는 빨리 재수술을 안 받으면면 위험해진다고 말했지요. 4번째 수술을 권면했어요. 그러나 저는 계속 수술을 받지 않겠다 버텼지요. 그냥 바젤교회나 섬기다가 죽겠다는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수술실 탈의실에서 담당의사와 마주쳤다. 그 담당의사는 김 선교사에게 “아니, 당신 수술실에서 일합니까? 당신 몸에 고질적인 염증이 있는데 수술실에서 일을 합니까? 이거 안되겠네. 병원 인사 담당자에게 신고해야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엉겹결에“당장 수술 받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자 이 담당의사는 스위스에서 이 분야의 수술 1인자라는 새로 부임한 교수를 소개해 줬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유는 세가지였다. 첫째는 다시 수술한다 해도 꼭 낫게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수술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수술실 안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술을 받게 되면 이 갖 시작한 목회를 그만두어야 한다. 단 몇사람 안되는 교인들이었지만 이 목회를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셋째는 이제는 직장에서 나가라해도 더이상 버틸 명분이 없었다. 수술후 또다시 병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수술을 피할 수 는 없었다. 기도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3일 금식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불치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않았다. 단지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서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수술을 받지 않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해진 날짜에 병원에 갔더니 저를 치료하는 담당의사가 새로 부임한 교수에게 제 상태와 관련해서 그간의 경위를 설명해요. 교수는 담당의사의 설명을 들은후 직접 저의 환부를 살폈습니다. 세차례나 수술을 행했던 그 환부입니다. 그런데 저의 환부를 유심히 살피던 교수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말을 했습니다. '이제 수술은 안 해도 되겠네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저를 치료했던 담당의사가 '말도 안됩니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교수가 '그러면 당신이 직접 확인하세요!'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그 담당의사 역시 수술받은 환부를 찬찬히 살피더니 '간호사, 소독핀세트 하나 가져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이 말을 들은 교수가 역정을 내며 벌컥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 핀세트 대지마세요. 내가 더는 수술 안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머쓱해진 담당의사는 김 선교사에게 나중에 아프면 다시 자기를 찾아오라고 말한후 진찰을 끝냈다. 스위스의 제 1인자라는 새로 부임한 교수의 진찰을 마친후 김 선교사는 즉시 집으로 달려가 이 소식을 아내에게 전해주었다.

"그 때 저는 당장 수술을 안 해서 좋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어서 좋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치료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그 지긋지긋한 병이 감쪽같이 나아버렸어요. 그 후 한 번도 아프지 않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장의 궤양등 여러 잡다한 다른 병들도 모두 나아버렸어요. 그후로 지금까지 이십여년 이상의 목회활동 기간동안 몸이 아파서 주일사역을 거른적은 한번도 없어요. 교수의 특진을 받은 몇달후 수술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또다시 저의 담당의사를 만났습니다. 웃으면서 그랫지요. '나 이제 깨끗이 다 나았습니다. 더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그랫더니 이 담당의사가 '나 그말 믿을 수 없어요'라고 해요. 무슨 뜻입니까? ”

바로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치유의 역사였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위스 땅을 밟았던 그는 이렇게 목회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는 그후 목회사역을 취리히로 확장하면서 병원일을 그만뒀다. 그의 아내역시 병원일을 파트타임으로 바꾸고 최소한의 소득으로 생활하면서 함께 목회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김 선교사는 나이 60이 넘은 지금도 매주 한번씩은 산동네 삼십리길을 거뜬히 달릴 수 있을 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바젤한인교회, 취리히중앙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를 사역하고 있다.
▲ 김정효 선교사의 부인 최옥순 사모     ©뉴스파워

그는 바젤에서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바젤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그 지역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분의 집을 방문해서 교회 나오라고 권한적이 있었했는데 부부가 다 싫다고 해서 그냥 왔어요. 그런데 몇 년 후 간호사인 부인이 자기 발로 교회를 찾아왔더라구요. 남편이 폭력적인데도 잘 참아냈었는데 청년이 다 된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까지도 습관적으로 매질이 가해지자 아들을 위해서 결국 함께 집을 나온 것이지요.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라고 해요.”

그 부인은 착실하게 교회를 출석하면서 세례까지 받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뇌종양에 걸렸데요. 급히 수술했어요'라고 그래요. 그래서 즉시로 이 아들이 입원해 있는 바젤대학병원에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이 부인이‘우리 아들한테 안수기도좀 해주세요’라고 해요. 그래서 안수기도도 해줬어요.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왔어요. 아들이 벌써 휴가 떠났다고 그래요.

처음에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되어서 그렇게 빨리 회복된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도저히 수술 할 수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병이 더 악화되기전에 여행이나 마음껏 하다오라고 돈을 줘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간 그 아들은 참으로 고독하고 힘겨운 투병 생활을 했다. 의사로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머니와 아들은 매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리고 김선교사는 주일오후 바젤한인교회의 예배를 마친다음에는 반드시 이 아이집에 들려 이 아이에게 안수기도를 해준후 집으로 돌아갔다.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던 날 이 아이는 이미 회복불능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김선교사는 이전처럼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준 후 이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애야, 주님께서 당신의 낙원에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곳은 더이상 아픈것도, 죽는것도, 이별하는것도,슬픈것도 없는 다만 기쁨과 행복만이 넘치는 평화의 나라란다."

그런데 이말을 하는동안 혼수상태인 이 아이의 얼굴에 엄청난 환희가 스쳐지나갔다.

"그래요, 목사님, 목사님 말씀이 맞아요."라고 하는듯 했다. 그 부인은 그 마지막 심방날 김 선교사에게 만일 아들이 죽으면 독일어로 장례식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김 선교사는 한 번도 독일어로 장례식을 해본 적 없어 매우 걱정이 되어졌지만 일단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사흘후 취리히교회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 취리히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아무도 성경공부에 오지않았다. 확인차 집으로 전화를 해보니 제각기 못올만한 사정들이 있었다.

사실은 이또한 하나님의 역사였다. 당시 취리히교회의 성경공부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스위스교회의 본당건물안에 있는 한 방에서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날 마침 교회사찰은 분주히 장례식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아무도 성경공부에 참석한 사람이 없었기에 김선교사는 그대신 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식절차와 그 모든 내용을 메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 아이의 어머니로 부터 이 아이가 그날 오후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연히 장례식은 독일어로 치러졌고 누가봐도 훌륭한 장례식이 되어졌다.

김 선교사에 따르면 스위스 전국에는 2200~2300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절반이 임시 체류자라고 한다. 바젤인근에는 100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그중에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온 청년들도 있다. 오페라극장의 무대위에서 성악가의 꿈을 펼쳐나가는 이들에게 바젤한인교회는 참으로 소중한 신앙의 보금자리다.

“청년들의 신앙도 좋고, 음악 실력도 좋아요. 3시간 반 동안 오페라 공연에 출연할 때도, 공연 전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청소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공연을 하러 갑니다.”

그는 바젤은 기독교 역사에 매우 뜻 깊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바젤은 종교개혁자 칼빈(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1564년 5월 27일)이 그의 미래의 사역지인 제네바로 가기전 그의 일생일대의 대역작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여 출판(1536년 3월)한 곳이라며 바젤에서 성시화대회가 열린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코프의 파리대학장 취임연설문을 초안해주면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이 연설문때문에 그와 니콜라스 코프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지고, 그는 이곳저곳으로 피해다니다가 마침내 바젤에 도착하여 한동안 이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게된다. 이때 그는 그의 일생일대의 대역작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여 출판했다.

그는 또 “바젤은 위대한 종교개혁자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kolampadius, 1482년-1531년)를 배출한 도시”라고 소개했다.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Ulridh Zwingli, 1484년 1월 1일-1531년 10월 11일)와 동시대의 인물로 쯔빙글리와 가까이 교류하면서 쯔빙글리가 취리히시의회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단행해 나가는 동안 그 역시 바젤시의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바젤의 종교개혁을 단행해나갔다.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쯔빙글리보다 한해 먼저 태어났지만 쯔빙글리가 카톨릭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몇주 후 그 역시 명을 달리하여 바젤교회당에 묻혔다.

김 선교사는 “바젤을 신학의 도시”라고 설명했다.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바젤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어요. 하지만 지금 바젤대학의 신학은 많이 좌경화되어 있습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김 선교사는 바젤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인터라켄(Interlaken) 지역에서 인터라켄 쉼터교회를 개척해 사역하고 있다.

“주후 6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선교사 베아투스(Beatus)가 이곳에 파송 받아 왔어요. 그분은 커더란 호수(Thunersee)가 있는 툰(Thun)지역으로 찾아왔어요. 아주 깊은 원시사회로 들어온 것이지요. 그분은 이 툰지역과 인접한 산동네 그리고 인터라켄지역을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죽어 호수가 언덕 동굴입구에 묻혔습니다. 그분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사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성자란 칭호를 받았어요. 그의 사역이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입니다.”

성 베아투스가 죽은 후 많은 순례자들과 수도사들이 그 지역을 찾아와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기도하고 갔다. 그러던 중 1130년 프라이헤른 셀리거(Freiherrn Seliger)라는 수도사가 순례자들을 위해 인터라켄 마트(Matt)에 조그만한 기도원을 세웠다. 그후 이를 근거로 어거스틴파 수도사들이 정식 수도원을 개설했다. 황제 로타르 2세(Kaiser Lothar 2세)와 부유한 상인들이 수도원을 후원해 주면서 인터라켄 전 동네가 하나의 수도원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인터라켄수도원은 남녀수도원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어 풍기문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었다.

“수도사들의 하루 일정표를 보면 매일 새벽 3시반에 기상해요. 그때부터 2시간반 간격으로 기도, 찬양, 말씀묵상을 저녁 8시반까지 되풀이해요. 식사시간은 하루 한번 오후 2시 이전입니다.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수도사들에게 철저한 금욕생활을을 시겼어요.”

김 선교사는 “그 수도원이 생긴 지 400년이 되던 해 쯔빙글리가 카톨릭군과의 전투에서 순교(1531년 10월 31일)했고, 그후 5년 후 칼빈이 제네바에 입성했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작정계획을 갖고 계시는데 그분께서는 땅위에서의당신의 작정계획의 성취를 위해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많은 기도의 수고를 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그 위대한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400년 동안의 기도가 쌓이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생활 400년간(창세기 15장 13절) 부르짖어 기도한후 출애굽사건과 광야 40년 사건이 일어나게 하신 것 처럼 말입니다.”

인터라켄 수도원의 역사와 그들의 삶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김 선교사를 보면서, 어쩌면 그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이 땅을 밟았고, 성 베아투스처럼 그렇게 이곳에서 제2의 베아투스처럼 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작정계획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먼 훗날 그에 대해서도 그런 역사적 평가와 기록이 남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인터라켄 수도원에서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와 칼빈(John Calvin,1509-1564)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쯔빙글리는 취리히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쌍트 갈렌(St.Gallen)지역의 빌트하우스(Wildhaus)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인터라켄수도원은 인접해 있는 베른시(Bern)의 보호를 받고 있엇는데 인터라켄 수도원의 영향으로 베른지역의 주민들은 스위스의 그 어느 지역보다 영적으로 깨어있었고, 그래서 그 어느 지역보다 먼저 종교개혁을 수용하는 지역이 되어졌다.

“만일에 베른시의회가 쯔빙글리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베른시의회가 칼빈을 배후지원하지 않았다면 스위스 종교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이 교리적, 학문적, 조직적으로 갖춰지면서 오늘날 개신교의 모습이 확립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베른시의회의 적잖은 영향력행사가 있엇어요. 물론 그당시 베른과 취리히와 제네바가 서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향력 행사도 가능했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와 쯔빙글리가 교회개혁운동을 함께하기 위해 회합을 가진적은 있지만, 서로의 입장차이때문에 함께 교회개혁운동을 펼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루터보다 20년 뒤늦게 태어난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을 계승하고 완성했다.

그는 교회의 정치와 조직은 스위스 풀뿌리민주주의에서 도입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왕정이었던 프랑스에서 온 칼빈은 민주주의제도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빈이 오기 전부터 이미 스위스에는 지역마다 자치 민주주의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스위스는 종교개혁에서 뿐 만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제도의 보편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 영국과 화란, 그리고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을 확산시켰다고 말했다.

“만일 칼빈이 없었다면, 쯔빙글리가 없었다면, 인터라켄이 없었다면…”그의 독백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2012유럽성시화운동 대표단들에게 “성시화운동은 한 가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중보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뭔가를 이루실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종교개혁의 진원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스위스는 지금 영적으로 황무한 땅이 되었다. 딸만 둘을 두고 있는 김 선교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청소년들에게는 술과 담배를 팔지않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법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모든게 방임된 상태입니다. 그러다보니 스위스 청소년들사이에 마약문제, 문란한 성생활문제 등 여러가지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어요.”

김 선교사는 청소년들이 술과 담배, 마약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갔고, 지역공동체를 찾아갔고, 정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청소년들을 술과 담배와 마약의 위험으로 부터 지켜주자고 호소했다. 심지어는 백화점 체인과, 담배 자동판매기회사에도 전화를 걸어 그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스위스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인데 왜 외국인 주제에 나서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하는 것과 같았어요. 하지만 이문제를 가지고 수년간 하나님앞에 기도의 씨름을 했어요. 그리고는 어느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어느사이에 모든 학교에서 전면적으로 금연이 실시되고 있었고, 모든 자동판매기에는 담배가 사라졌으며, 한때 느슨하게 규제되었던 대마초와 마약의 거래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어요. 엄청나게 바뀐 것이지요.” 기도의 힘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김 선교사의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합창단이 베른에서 제일 큰 교회 예배당에서 합창 발표회를 가졌다. 1000명 규모의 예배당에 30프랑이 넘는 입장료를 내고 학부모들과 주민들이 관람했다. 합창단의 주제가 ‘예수의 생애’였다. 문제는 발표회 중간 중간에 한 목사가 올라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는 사기꾼이다. 그는 사람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기만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다."라는 등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김 선교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다. “목사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올 때 사람들 앞에서 호되게 야단을 치면서 망신을 줬지요.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지요. 그리고 몇일후 신문에는 이 목사의 잘못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고, 합창을 지휘했던 음악선생님은 제 의견을 학생들에게 성실히 전달해 주었습니다."
▲ 쯔빙글리 기념동상 앞에서 쯔빙글리에 대해 설명하는 김정효 선교사     ©뉴스파워

칼빈과 쯔빙글리 등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했던 스위스의 작금의 영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건이다. 스위스는 국가가 종교세를 거둬서 국가교회 목회자들에게 월급을 준다. 장관급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목사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들은 복음의 열정을 잃어버렸다. 신학은 자유주의에 빠져버렸고, 신앙과 삶은 세속화되어 버렸다. 동성애자 목사들이 스스로 커밍아웃하면서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라고 말해 교회가 분열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고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목회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을 국가교회목사들과 구별해서 자유교회목사라고 부른다.

“스위스에서 교인 100명이 넘으면 큰 교회입니다. 교인 30명 정도가 모이면 보통규모의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설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국가교회는 티벳의 승려인 달라이라마를 데려다가 강연도 듣고 함께 예배도 드립니다. 심지어 모든 종교를 위한 종합예배당을 짓자고 말하기도 합니다."

김 선교사는 “복음적 설교와 신앙적 삶에 대한 바른 교육은 바른 신학교육으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복음적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게 하는 성경적 신앙관을 옹호하고 확산하게 하는 교육훈련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화란의 복음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목사에서 신학자, 신학자에서 언론인, 언론인에서 정치가로 그의 활동 영역을 넓혀갔어요. 그의 목표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케 하는 참다운 기독교 문화의 확산이었습니다.”고 설명하며 성시화운동을 통해서 교회 내에 참다운 기독교문화가 회복되어지고, 세상에 참다운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어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정효 선교사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특히 한국 교회 일부에서 칼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칼빈이 제네바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라는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쉽게 마음은 열지 않습니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망명을 온 사람이에요. 그는 짧은 기간 슈트라스부르그(Strasburg)에서 사역했지만 슈트라스부르그시는 그에서 서슴치않고 시민권을 주었고 여러가지 특권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의 칼빈은 불과 죽기 몇년전인 155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네바시민권을 받았어요. 시민권이 없다는 것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이란의 호메이니처럼 군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김 선교사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도들인 프랑스 위그노들이 스위스로 많이 이주해왔다. 그들은 시계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들어와왔는데 제네바시의회가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자 시민들이 집단으로 시위를 하면서 위그노들에게 적어도 10년간은 참정권 주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 선교사는 칼빈의 제네바 체류당시 칼빈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 당했다는 주장도 반박했다. 특히 삼위일체를 부인한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09-1553)사형 언도도 칼빈의 결정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등 워낙 자기 주장이 강해 스페인에서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칼빈은 교회에서 목회만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네바 시의회에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이단사설이라며 사형을 시킨 것입니다. 물론 신학자인 칼빈은 시의회의 재판에 불려나가 세르베투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화형이 언도되자 칼빈은 화형이 아닌 다른 형태의 형벌이 그에게 적용되어지도록 건의를 했어요.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의 건의를 무시하고 그를 화형에 처했습니다.”

김 선교사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25년간 성 피에르교회의 주임목사로 사역했지만, 직접적으로 제네바 시의회를 좌지우지 하지는 않았다고 거듭 밝혔다. 칼빈의 영향력은 교회업무와 신학교육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이 죽기 전 제네바 시의회에 일어난 사건으로 시 의원들을 비판했다가 그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형에 처해질뻔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면서 칼빈이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하여 공포정치를 했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선교사는 1530년 대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할 당시 제네바 인구는 7,000명 정도였는데 1559년 칼빈이 개교한 제네바아카데미에는 1500여명의 학생들이 유럽각지에서 유학을 와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공부했고, 그들이 다시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널리 보급했다며 바른 신학, 바른 신앙의 수호를 위한 복음주의 신학훈련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함을 강조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지금의 제네바대학의 전신이다.

온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스위스에는 교회당 건물이 어느 곳이든지 건물이 제일 크고, 제일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항상 교회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시의회 옆에는 항상 교회건물이 있는데, 교회 건물이 제일 높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징입니다.”

“항상 교회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라”,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지 못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낯선 이국땅에서 첫발을 딛자마자 생사를 넘나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았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오늘도 묵묵히 바젤로, 취리히로, 인터라켄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를 이곳에 보내신 신실하신 하나님,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일랜드 선교사 성 베아투스처럼, 그도 이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 최옥순 사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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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17 [02:53]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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