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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15 [18:05]
한국 장로교와 통일
예장통합 총회설립 100주년 포럼에서 주도홍 교수 발제 전문
 
주도홍
한국 장로교와 통일
 
주도홍
백석대학교 교수
기독교통일학회 회장

1. 들어가는 말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1)
 
필자는 장로교 총회 100주년을 맞으며 한국교회에게 새로운 결단이 있어지길 소망하며, 아울러 21세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가 어디로 향하여야 할 것인지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곧 한국교회의 미래를 향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꿈꾸는 자Dreamer 한국교회를 서술하는 일이 필자의 몫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남북 분단 하 한국교회가 암울한 역사 가운데서 어떻게 통일 한국을 꿈꾸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지를 함께 고민하고 궁리해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연한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꿈과 비전은 그 종착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닿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꿈은 그러기에 주님의 재림 앞에서 드러나고 제시되어야 할 그 종말론적 비전, 성경적 비전이라는 사실이다.
  
2012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100주년을 맞았다. 2천년 세계교회사에 비할 때 1/20에 해당되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한국 장로교회는 100여 년 동안 세계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누렸다. 세계교회도 부러워하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한국교회를 주목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막중한 책무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한국 장로교회의 성숙을 위해 역사의식과 사명감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21세기 모델교회로 드러나길 소망한다.
 
그렇다고 한국교회에는 마냥 감사할 일만 있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세상과 세계교회를 향해 부끄럽고 불미스러운 일도 많았는데, 이는 급성장한 한국교회를 낮추시며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었음을 기억하는데, 자칫 교만과 자만에 빠질 수 있는 한국교회를 사랑과 훈계로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이었던 것으로 인정한다. 결코 길지 않은 세월 속에서도 한국 장로교회는 수많은 분열을 거듭하였으니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서로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관용하지도 못 한 채 상대방의 작은 티를 들보로 확대해 보며 정죄하며, 아니 부질없는 세상 욕심 때문에 수많은 싸움과 분열을 거듭해 왔다.2) 한국교회의 분열에는 대충 일곱 가지의 원인이 있음을 본다. 곧, 본국의 교단을 심으려 했던 선교사들 때문에, 그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이의 갈등 때문에, 일제 하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적 견해 차이로, 공산주의를 향한 입장 차로, 지역 갈등으로, 기성 교단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독립교단의 출현 때문에 한국교회는 분열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3) 거기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잘못된 세속적 가치관을 지닌 교단 지도자들의 교권싸움이 분열의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세계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분열기록을 한국 장로교회가 남겼으니 참으로 회개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2012년 현재 300여개가 넘는 한국 장로교단은 기네스북에라도 올릴 수 있을 만큼 무분별한 분열의 프로, 아니 분열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가 된 군소 장로교단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들에게서 배출되는 무자격 목회자들은 이제 한국의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점들로 부각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의 퇴락의 한 이유가 되어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작은 교단이기에 문제가 많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쩜 세속화와 물량주의에 빠진 대형교단일 경우 역으로 더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배태해 낼 수밖에 없다. 사실 속이 꽉 찬 작은 교단과 교회들이 훨씬 성경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빠뜨리고 싶지 않다.    
 
특히 1000만 이산가족을 낳았던 한반도의 분단과 이로 인해 동반되는 수많은 폐해는 다르지 않게 한국교회의 분열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성이 어둠에 잠긴 지 이제 반세기를 훨씬 넘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분단의 커다란 상처를 기도의 제목으로 붙들었던 간절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소리도 힘을 잃고 잠잠해진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단지 그 일에 뛰어든 몇몇 종사자들의 미약한 기도소리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다수인 한국 장로교회가 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엄청난 정신적 영적 국가적 재정적 문제를 간과한다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이 문제가 한국교회에게 무엇을 뜻하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바로 인식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세계선교를 거창하게 외치고 열정적 이웃사랑을 내세운다 할지라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북한에 살아가는 동족 2400만을 향한 마땅한 사랑과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특별한 소명을 방기해서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는 유대 동족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간절한 외침을 들을 때 비성경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한국은 세계 유일의 암울한 분단국이다. 21세기 한반도의 분단은 지난하며 철저하며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토록 나누어 사는 민족이 과연 세계 역사에 또 어디에 존재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한 미움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남북관계만이 아니고, 남남관계에서도 그 미움과 갈등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곧 이념의 종노릇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한국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복음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복음에 이념을 덧칠해서는 안 된다. 순수한 복음으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인간의 아이디어인 이념은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에 무릎을 꿇어야 하고 꿇려야 한다. 이념을 추종하며 그것이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줄 기대했던 사람들은 어리석음을 자인하며 복음에로 나와야 한다. 오직 예수 부활의 복음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그 복음에 인간의 참 행복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고, 주의 생명의 진리인 복음의 가르침을 먼저 순종해야 한다. 아니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한다. 복음을 이념과 싸우는 인간적 수단으로 전락시킴은 하나님의 지혜를 욕되게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의 잘못된 가치관을 정정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며 생명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외치고, 이웃사랑을 목 놓아 외치더라도 가장 가까운 우리의 이웃 북한의 2400만의 영육을 사경에 헤매게 방치하고 있다면 한국교회는 위선자이며, 회칠한 무덤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바로 성숙하기를 원하시며, 보다 업그레이드되길 기다리신다. 그것은 남북 분단의 거대한 과제를 한국교회가 주의 진리를 따라 감당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중요한 숙제를 망각한 지가 오래되었다. 아니 그것이 숙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기도소리도, 설교도 끊인 지 오래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화려한 초막 셋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지으려 할 뿐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문제의 현장 속에서 주의 제자로 살기를 명령하신다. 가장 거대한 죄악의 실체 남북의 분단 그로 인해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죄악들과 싸우기를 원하신다. 사랑으로, 복음으로, 인내로, 관용으로, 생명의 지혜로, 악을 선으로, 원수 사랑으로 이기기를 원하신다. 우리 주님이 세상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이기기를 기다리신다.
 
왜 독일통일을 '조용한 개신교 혁명'으로 일컫는지 나누어진 분단의 한국교회가 깊게 묵상하며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후 한국교회에 내리신 하나님의 숙제를 비로소 감당할 수 있길 갈망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게 하나님은 그토록 기다렸던 또 다른 숙제를 내리실 것이다. 그 숙제는 세계복음화의 마지막 스테이션과 관계되며, 그렇다면 마지막 약속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과 긴밀히 상관된 과제일 것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 분단의 극복은 한국 장로교회에게 내리신 막중한 21세기 과업임이 분명하다. 어떤 식으로든지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어렵고 힘들지만 의지적으로 한국교회에게 내리신 그 과제를 성령을 힘입어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 역사적 과제는 어떤 식으로든지 한국 장로교회의 성숙과 개혁에도 긴밀한 관계가 있고, 한국 장로교회가 마땅히 지니고 성취해 내야 할 21세기의 비전, 세계복음화와도 깊은 상관성이 있을 것을 확신한다. 사실 한국교회의 수많은 문제와 쇠퇴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부여한 과업을 소홀히 여기고 다른 엉뚱한 곳에 정력과 관심을 쏟는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성경적 통일론
 
2.1) 원수를 사랑하라
 
한국교회가 한반도의 분단 그로인한 민족의 분단에 근 반세기 동안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는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통해 가졌던 공산주의를 향해 품었던 미움과 그들에게 당했던 과거의 아픈 상처로 인해 북한에 대해 쉽게 풀어낼 수 없었다. 한국교회는 반공을 북한을 대하는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기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쉽지 않았다. 두 이념의 대결은 양자택일, 양육강식, 권력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악의 순환으로 이끌어졌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이 주었던 깊은 상처를 이제는 다른 방법이 아닌 오직 십자가의 위대한 복음으로 풀어내야만 하고 치유 받아야 한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친히 내어주어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셨던 그 십자가의 부활신앙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지금까지 맺힌 것을 풀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한국교회는 구현해 내는 것이다. 결코 이념의 문제를 이념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기에, 오직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고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이념으로 인해 헛되이 꿈꾸었고 그로 인해 입었던 깊은 상처를 오직 복음으로 치유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더 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감동을 시키는 것이다. 사실 두 이념은 분명 차이는 있었으나 많은 문제점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무엇보다도 인간의 착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부활복음은 다른 차원의 신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을 통해 이념에 물든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복음은 제한되어서도 그 누구에게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한국교회가 북한을 향해 가져가야 할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그 부활 생명의 복음이 절실히 요구하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덧입어 미움도 버리고 아픔도 버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오직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아니 위해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원수사랑에서 그 절정을 제시한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생명의 길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2.2) 사마리아로 가라
 
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문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주의 길을 막을 때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의 몸 된 교회라는 이름과는 맞지 않게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21세기 사마리아 북한’을 앞에 두고 한국교회는 하나의 중요한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하겠다. 그 물음이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제자들을 따를 것인가?’이다. 좀 엉뚱한 물음 같지만, 오늘의 한국교회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던져야 하는 물음이다. 남북 분단의 문제를 접근하려 할 때 한국교회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곧 복음과 이념의 상관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이며 인간의 한 아이디어인 이념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우리의 생명인 복음의 발목을 잡아서도,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는 결코 안 된다. 그 이념이 예수님의 길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르게는 우리의 생각, 인간적 가치관으로 예수님의 생각을 뜯어고치려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인과의 상종을 꺼렸던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택하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굳이 예수님은 새롭게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고 고집하셔야만 했는데, 제자들이 완강하게 예수님의 길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터부시하여 그들을 멀리 했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세상적 이유를 들이대며 진리이신 주님을 설득하려 해서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제자들 역시 자신의 생각, 논리를 펼치며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 했으며, 자신들의 길을 거꾸로 자신들의 선생이 따르기를 강요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꼭 사마리아로 들어가야만 하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참으로 특이하게도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신 예수님을 거꾸로 가르치려 하였다는 사실이다. 12제자가 부름 받은 사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변화된 삶을 구현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오늘에도 주를 따른다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주님을 거꾸로 가르치려 하며 여전히 자신들의 세계관, 가치관을 그 주님께 강요하는 오류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은지 하는 점을 발견한다.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고 하면서 진리이신 주님을 도리어 설득하며 자신의 세계관으로 덧칠하여 참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혹시 이러한 일들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지 냉철하게 돌아와야 할 것이다.
   
북한을 21세기 사마리아로 일컫는 이유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한 북한, 생존위기에서 세계를 향해 늘 도움의 손길을 내밀 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많은 나라들이 북한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나라, 종교적 집단(cult)일 뿐 아니라, 가까이 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불편한 나라, 유래를 찾기 어려운 비인권적 공산주의 독재국가, ‘테러 집단’으로까지 일컫기를 망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운 나라, 뭔가 정상적이지 못한 나라로 피하고 싶은 나라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북한을 향해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지를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 후 그 주님의 음성을 순종하여야 함이 마땅하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북한을 향한 한국교회의 지금까지의 모습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지 말라는 제자들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향해 반공을 내세우며 또는 적그리스도라 칭하며 북한을 향한 한국교회의 소명을 귀담아 듣지 아니했다. 소홀히 하면서도 얼마든지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나태와 게으름을 합리화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21세기 사마리아 북한을 두려워한다거나 미워한다거나 고립시키려 하지 않으시고 친히 들어가실 것을 충분히 미뤄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두운 그 땅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전개될 놀라운 일들을 우리는 넉넉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만난 수가성 여인을 통해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수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고 구주께 나아와 천국의 삶을 맛보았듯이 북한 역시 그 기쁨과 은총을 누릴 것을 얼마든지 대망할 수 있다. 자신들을 행복의 나라, 유토피아로 이끌어줄 줄로 알았던 그 이념의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지를 주께 나아와 회개하며 새로운 삶의 진리로 나올 것을 기대한다. 잘못된 사상과 이념의 노예가 된 그들은 한국교회가 터부시하며 미움과 타도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이며 선교의 대상,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21세기 사마리아 북한을 두고 가감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

2.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재고
 
한국교회는 종종 북한 돕기를 내세우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져와 성경적으로 설득한다. 강도를 만나 사경을 헤매는 자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태도는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 따르미로서 순종하며 전적으로 실천해야 할 예수님의 명령임이 틀림없다.4) 물론 한국교회가 인도주의적 북한 돕기를 주장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시하는 점은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으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이 비유는 북한 정권을 강도로, 강도만난 자를 북한 주민으로 전제해야 하는 나름대로의 불편함, 곤란함이 있다는 점이다. 강도가 떠난 이후에 전혀 강도와는 상관없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도운 것으로, 이 비유의 핵심은 강도를 정죄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을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이다. 그 어떤 강도를 향한 정죄, 미움을 말하는 것은 예화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북한 주민을 향해 이 비유를 가져올 때 한국교회는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 내지는 판단을 먼저 내림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은 이 비유의 의도와는 다른 점을 말하고 있기에 해석에 있어 적절하지 않다. 예수님의 비유는 죽기까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요청할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과거 공산당에게 당한 상처를 은근슬쩍 어루만져 주는 양면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한쪽으로는 북한을 향한 정죄를 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북한 돕기를 설득하는 양면 효과를 거둘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엄격하게 볼 때 성경해석에 있어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북한 당국을 자극하여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북한 돕기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북한을 감동시켜야 하지, 그 어느 한 쪽은 정죄하고 소외시키면서 다른 한 쪽을 위하는 식의 일방적 긍휼 또는 좀 심하게 말해 이간질하려는 꼼수를 부려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의 북한 돕기는 어려움에 빠진 북한 전체를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긍휼히 여기고 도울 뿐 아니라, 그들이 더 나은 미래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넓고 깊은 사랑에 의해서만이 한국교회의 북한사랑은 주의 뜻을 순전히 순종하는 것이 되며, 남북의 분단을 넘어 서는데 힘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엄격하게 볼 때,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예수님(요4)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막4)를 굳이 상관 시킬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에서 두 본문을 들어 한국교회의 북한을 향한 자세를 교훈하려함에 있어서는 분명하게 그 이해의 순서를 바로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사마리아로 들어가셔야만 했던 그 주님을 바로 이해하고 따를 때만이 한국교회는 비로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그 주님이 말하고자 하셨던 그 사랑의 요청을 바로 인식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정죄와 편 가르기 없는 순수한 큰 사랑이다.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의 요청을 남을 정죄하는데 결코 오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은 범죄한 강도를 정죄하고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구원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이다. 십자가 위에서 만난 강도에게 구원이 선포되는 장면은 오늘 한국교회가 마음에 담아야 할 소중한 장면이다. 이런 맥락에서 십자가의 복음은 강도와 같은 죄인들을 감동시키는 복음이어야 한다. 그들을 정죄하며 기독교적 삶의 영역에서 쫓아내어 소외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럴 경우 다시 바리새인적 우를 범하게 되며, 사람의 하나 됨을 근원적으로 추구해야 할 통일의 아름다움을 한국교회가 앞서 부서뜨리게 될 것이다. 제자들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치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셔서 사마리아의 복음화를 이룩하신 놀라운 예수님처럼 한국교회는 북한을 품에 안고 기도한 후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정죄와 판단의 칼을 내려놓은 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행했던 그 순전한 사랑을 비로소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4) 교회의 슬림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의 명령에 제자들은 순종하며 따랐을 뿐이었다. 양자 간 다른 협약도 그 어떤 조건도 묻지 않았고 있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물을 버렸고, 집과 전답을 버렸으며, 심지어 가정을 버리고 그들 인생의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님만 따랐다. 다르게는 예수님은 그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를 때도 다르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갈대아 우르를 훨훨 떠나야만 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져야만 했던 나그네와 외국인으로서의 그 라이프스타일은 오늘 여러 가지로 문제 많은 한국 장로교회가 주님의 소명을 따를 때 지녀야 할 삶의 모습임이 틀림없다. 2천년 교회사에서도 진정으로 주를 따르는 자들의 자세는,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도 하나같이 강조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청빈이었다. 곧 가난한 자로 주를 따랐다는 말인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주를 따를 때 영적으로 가장 홀가분한 상태, 주의 일을 할 때 걸릴 것이 없는 상태, 영적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몸가짐을 의미한다 하겠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고 있는데, 물질, 명예, 쾌락 그리고 권력에로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사람들도 거룩하기를 원하시는데(레11:44-45; 벧전1:16)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구별된 삶을 살기보다는, 속물 권하는 세상에서 그 세상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채 속물이 되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서 바른 길을 가려면 자신을 바로 지켜 먼저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 아니라, 진정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한국 교회는 제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없는데,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가진 너무 많은 것들이 가야 할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슬림화는 영적 갱신의 전제라 하겠다. 교회의 슬림화란 바로 교회가 청빈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으로 영적 갱신을 위해 요구되는 전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출발하기 전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성령에 이끌려 사막에서 금식하며 기도에 전념하셨다.(마4:1-11; 막1:12-13; 눅4:1-13) 마귀는 예수님을 물질,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시험했으나, 예수님은 간교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예수님은 세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으며,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가장 홀가분한 상태, 사역을 위한 최상의 상태, 가장 가난한 상태로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비로소 입을 열어 전파하셨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왔느니라”(마4:17)였으며, 산상수훈 8복 중 첫 번째 복으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눅6:20)임을 선포했다. 사실 한국교회의 초창기 역사를 보면 한국교회가 어느 정도 초대교회적 순수성을 가진 모습으로 시작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 급작스런 경제부흥과 함께 양적 교회성장을 누리면서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세상을 좇는 모습은 도를 넘어 급기야 존경은커녕 세상의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순수하고 홀쭉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의 복귀가 21세기 한국교회를 바람직한 상태로 이끌어 줄 것이다. 보다 가난해지고, 작아지고, 순수하고, 몸집을 줄여갈 때 한국 장로교회는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기꺼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의 사탄을 대적한 예수님의 음성은 오늘 한국교회에게 중요한 지침이 된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11)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교회로 한국교회가 거듭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일군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는 보통 어려운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통일을 향하여 아니 통일시대 한국교회에게 부여되는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쟁터에 임하는 군인마냥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모습에로의 몸가짐과 자세가 전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영적 재무장의 굳은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3. 독일통일의 교훈
 
여기서는 독일통일에서 독일교회가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살펴보며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럼에도 필자의 여러 앞선 글 가운데서 수차 언급했기에 간단하게만 언급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독일통일을 ‘조용한 개신교 혁명’으로까지 일컫는다. 이는 독일교회가 독일의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그 어떤 정치, 경제적 노력을 넘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교회로서 했다는 뜻이다.5) 독일교회는 정치적 분단을 대면할 때 나름대로 성경적 통일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교회가 동독을 대할 때 ‘그 특별한 유대관계’(die besondere Gemeinschaft)를 유지했는데, 정치와 이념을 넘어서서 독일교회는 복음에 입각한 관계를 잊지 않았다. 아무리 동·서독 간 냉전이 찾아와도 독일교회의 동독을 향한 입장에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이 ‘특별한 유대관계’는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물론 교회를 향한 정치인의 성숙, 역으로 정치를 향한 교회의 성숙이 함께 해야겠지만, 이 ‘특별한 유대관계’를 향한 독일교회의 견고한 마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교회는 교회의 길이 있어야만 하는 데, 성숙하지 못한 교회는 정치와 이념의 영향을 쉬 받아 자기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본다. 부화뇌동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보다는 교회가 도리어 세상의 조종을 받고 그 세상의 영향을 받는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으로 정치가 교회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수하에 두어 꼭두각시로 전락시키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일교회는 여기서 확실하게 동독과의 특별한 관계를, 공동체 의식을 어려움에 처한 동족과의 형제의식을 잃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그 특별한 유대관계’였다. 동독교회(BEK)의 헌법에도 명시되었던 ‘그 특별한 유대 관계’는 1990년 통일의 순간까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었던 역사였다. 사실 동독 정권이 교회의 태도를 무시하며 가로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배경에는 서독교회의 지원이 동독경제에 실질적으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동독을 향한 서독교회의 실천적 사랑은 독일교회 연합(EKD)에 의해 유지되었던 『디아코니아 재단』(Das Diakonische Werk)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서독교회의 디아코니아 재단을 통한 동독을 위한 재정적 지원은, 이미 많은 글에서 제시되었던 대로였다.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독일교회는 ‘사회주의 속의 교회’의 현실과 아픔을 직시하며, ‘그 특별한 유대관계’를 위해서 ‘섬김의 신학’, ‘성육신의 사랑’을 성경에 입각하여 실천하기를 분명히 했다. ‘사회주의 속의 교회’였던 헝가리 교회도 견지했던 ‘섬김의 신학’이란 이 땅에 ‘섬기는 자’(diakonos)로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섬기시고 친히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셨으며, 자신의 통치를 이러한 섬김을 통하여 구체화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랑을 독일교회는 동독을 향하여 실천하였는데, 그 사랑엔 그 어떤 조건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서독교회의 철저한 헌신과 희생이 동독을 향한 ‘그 특별한 유대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동독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위해 독일교회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명목 있는 지원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도움을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생각하였는데, 이는 동독교회가 서독교회에게 조금이라도 속박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의도가 있었을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른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해서였다. 둘째, 확고한 철학과 순수한 지원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주는 자의 편에서 이 정신은 절실히 요청되었다. 관용과 다양성에 대해서는 남다른 이해를 가지면서도 자신들을 향해서는 언제나 예리한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다. 셋째, 지원의 다양성과 대담성을 가졌다. 지원은 금전 또는 물자로 이루어졌는데, 수요자 중심의 지원을 잊지 않았다. 넷째, 서독 정부도 참여한 재정지원이 이뤄졌다. 재정적, 법적, 그리고 관세에서 교회가 동독을 잘 도울 수 있도록 돕고 배려했다. 서독정부의 독일교회를 위한 재정보조는 ‘내독관계 예산’에서 지원하였다.
 
이러한 서독교회의 동독지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일 후에 이뤄졌는데, 일곱 가지로 제시되었다.
 
1. 동독경제에 도움을 주었다. 2. 동독의 외화획득에 도움을 주었다. 3. 어려운 동독의 물자조달에 도움을 주었다. 4. 정치적, 법적 장애가 극복되어 교회의 유대관계가 향상되었다. 5. 동독의 교회기관, 양로원, 병원 등 실무기관을 도울 수 있어 동족의 고통을 완화하였다. 6. 어려운 동독교회에게 힘을 주어 복음을 통한 중요한 삶의 원리를 사회주의에 제시하였다. 7. 결국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를 재촉했다.   
 
독일통일이 되었을 때 어떻게 ‘그 특별한 유대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단지 특별한 인내와 겸손 안에서, 형제자매를 도울 만반의 준비와 능력 안에서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과정 가운데서 어찌하든지 또한 계속 돕고자 할 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독일교회는 말했다. 독일통일 후 디아코니아 재단의 책임자였던 노이캄 목사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자신들의 분단 하 동독을 향한 섬김과 봉사를 성령의 역사로 묘사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 있을 때에 디아코니아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그 능력의 교회에 지체가 된 여자들과 남자들이 살아 활동하는 그 현장에서 말입니다.”6)

4. 한국교회의 통일 준비
 
4.1) 탈북주민의 교회적응
 
한국교회의 탈북주민들의 사회적응을 말하기 전에 교회적응은 과연 바람직했는지 묻는다면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대형교회가 앞장서서 이 일에 관여했지만 실적이 매우 저조함을 자인한다. 한 마디로 말해 어려웠고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한국교회가 탈북주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한다면, 하물며 한국 사회에서의 그들의 적응이 어찌 성공적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탈북주민의 한국생활로의 적응여부는 통일한국에서의 사람의 하나 됨에 중요한 원리와 지혜를 부여한다. 탈북주민들의 신분의 불연속성으로 인한 사회적 자산(social capital)과 인간관계(relationship)의 상실에서 오는 사회적 박탈감, 경제적 어려움, 문화적 충격, 정서적 불안으로 오는 한국에서의 적응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많은 전문적 숙고가 요구된다.
 
한국교회가 20년 가까이 나름대로 탈북주민들의 보다 바람직한 한국 적응에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에 힘을 쓰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의 관심은 탈북주민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부분에 보다 긴밀한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 교회는 먼저 그들을 물질적 도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이 부분을 교회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하다. 경제적, 물질적 어려움은 국가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교회도 힘닿는 대로 도와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부분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상처 입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을 뿐 아니라,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사전 연구와 준비로 이 일을 교회가 감당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인데, 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이유는 한국교회가 이 일에 사전준비가 미약했을 뿐 아니라, 물신주의 사상이 한국교회 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북한 사람을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을 동일한 인간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가난하기 그지없는 고로 뭔가 실패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비성경적 인간관에 근거를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난하기에, 잘못된 이념의 희생자이기에 저급한 인간으로 간주한 거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중국에서의 신앙생활 때문에 한국교회에 발을 딛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한국사회에 어느 정도 문화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은 뭔가를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한국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탈북주민을 정당한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들을 국외자outsider로 만들어 정착을 어렵게 한 결과 그들은 어쩌면 당연하게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15년 이상 탈북자 사역을 하고 있는 조요셉7) 박사는 탈북주민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그들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탈북주민을 향한 한국교회의 제대로 된 사역 없이 북한선교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거기다 탈북주민들의 바람직한 한국 정착여부는 다가오는 통일한국에서 어떻게 남과 북의 사람들의 하나 될 것인 지를 앞서 가르쳐주는 리트머스 지와 같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2) 사람의 통일을 준비해야 
 
   법과 땅이 하나 된 통일한국은 사람의 하나 됨을 위해 영역별로 많은 과제를 치밀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 중 한국교회는 통일한국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분야를 알아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사람의 하나 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8)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이기에 통일 후 쉽게 하나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나이브하고 근거가 불안하다. 물론 뭔가를 민족동질성 위에서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은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안일한 기대가 통일 후 사람의 하나 됨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R. 그린커는 이러한 사고가 비현실적 통일론을 형성하게 되어,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남북한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진정한 통일의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인식하며, 이를 한민족 동질성의 신화라고 강하게 비판한다.9)
 
현재 한국교회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낭만적인 민족주의를 버리고 북한주민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요구된다. 남과 북은 70년 가까이 다른 이념과 문화를 가지고 나눠져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곧 서로 다른 정체성이 재생산되어 버렸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쪽은 자본주의 이념과 더불어 미국을 위시한 서구문화에 길들여져 있으며, 북쪽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채 중국과 러시아의 문화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점은 다른 둘 사이에 처절하고 철저하게 나누어져 더욱 큰 단절과 차이를 형성해 왔다는 사실이다. 민족성은 서로 교류를 통해 시간과 함께 형성되는데, 남과 북은 전혀 그렇지 못한 채 이질감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의도적으로 서로가 다름을 연습해 왔는지도 생각해 볼 일인데, 그것은 서로를 적대적으로 비판함으로서 의도적으로 형성시킨 다름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10) 그러기에 언뜻 보기에는 남과 북이 같은 언어, 식습관을 가진 민족이기에 처음에는 선뜻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는 예상 밖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에, 하나 되기 위해 치밀하게 이질감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통일한국에서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의 정서적 통합을 위해 전문적인 사전 준비를 성경에 근거하여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조금이라도 잘못된 세속적 가치관이 성경적 요청을 물리치고 앞서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 관계의 회복을 전제로 할 때이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됨에 역점을 우선적으로 두어야 한다. 그런 후 철저하게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여 통일 한국에서 사람의 하나 됨에 겸허하게 섬기는 한국교회가 되는 일이다. 여기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섬기는 훈련이 없을 때 한국교회는 또 다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사실 독일교회도 통일 후 교회에로의 복귀의 붐이 일어날 줄로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대는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독일교회는 돈과 잘 교육된 목회자들만 있으면 분단 전 기독교국가 상태로의 복귀는 쉽게 이루어질 줄로 예상했으나 이는 일장춘몽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반세기 가까운 기간 공산주의의 철저한 반기독교에로의 세뇌교육이 통일 후에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는 한국 통일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한다. ‘제2의 예루살렘’ 평양을 꿈꾸며 북한에서 교회에로의 복귀가 금방 행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독일통일에서의 경우를 볼 때, 쉽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그러한 기대와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음은 사실이다. 한 예로 ‘북한교회재건운동’은 그러한 기대 위에 행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11) 그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통일 후에 어떻게 할 것이라는 철저한 계획도 중요하지만, 현재 분단 하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하는 북한을 향해 주님이 원하시는 마땅한 할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은 북한이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순수하게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실 북한선교라는 말 보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북한사랑이 더 타당하다. 한 예로 사랑의교회(담임목사 오정현)는 이 일을 하는 부서의 명칭을 ‘북한사랑선교회’(약자-북사랑)로 일컫는데 바람직하다 하겠다. 성경적으로 볼 때도 먼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에야, 복음을 전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도 배고픈 자, 병든 자를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셨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육신의 떡만을 찾아 올 때 생명의 떡을 주고 싶었던 예수님도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를 전제로 도와주는 일도 조심스럽게 삼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순수하게 먼저 이웃을 섬기며 돕고, 그들에게 별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성경적이다.
         
4.3) 한국 신앙고백 The Confessio Coreana를 만들어야
 
언젠가 21세기 세계사의 최대의 사건이 될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분명 한국교회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교회 앞에「한국 신앙고백」(The Confessio Coreana)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성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이토록 지난하게 처절하고 철저하게 나누어져 서로를 원수로 미워하고 적대시하던 남과 북이 특별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 되었을 때, 한국교회는 감사, 회개 그리고 비전을 담아 한국 신앙고백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 한국교회는 북한을 위해 많은 일을 긍정적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많은 죄악도 저질렀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거의 반세기 동안 공산당에게 당한 상처를 안고 한국교회는 남북분단에 대해 침묵을 해왔으며, 또는 분단을 넘어 하나 되는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위정자들의 정치놀음에 편승한 적이 적지 않았다. 곧 성경적 길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기보다는, 그 성경적 길을 어두운 세상에 제시하며 앞서 가기보다는 잘못된 시대정신을 따라가는 자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분단 70년이 다 되어감에도 공교회적으로 한국교회가 성경적 통일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뭐라 해도 입을 열어 변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은 더욱 요구된다 할 것이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사에서 볼 때도 세계교회가 주목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신앙고백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볼 때도 개혁교회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성경에 입각한 자신들의 생생한 신앙을 고백해 왔다는 사실이다. 개혁교회사를 보면 그 어떤 다른 교회보다도 개혁교회에는 수없이 다양하고 많은 신앙고백들을 시대와 장소를 따라 나타났고, 그것을 개혁교회는 고유한 유산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다. 개혁교회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이는 3대 신앙고백으로는 「벨기에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The Heidelberg Confession, 1563), 「도르트 신경」(The Dordt Canons, 1619)이다. 거기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을 추가하고 있다.
 
최근 한 예로 20세기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비극 그 자체였던 인종차별제도를 어렵게 종식시키며 흑백 인종 간 화해를 이루어내는 데 공헌했는데, 남아공의 화란 개혁선교교회 총회는 1986년 「벨하 신앙고백」(The Belhar Confession)을 채택하기에 이르렀고, 새롭게 결성된 남아공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 of Southern Africa[URCSA])의 ‘교회 일치를 위한 표준문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벨하 신앙고백」은 남아공의 지난한 인종차별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그 어려움 속에서 자라기 시작하였는데, 1982년에 알란 보삭(Allan Boesak)의 리더십 하에서 화란개혁선교교회(Dutch Reformed Mission Church [DRMC])에 의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보였는데, 내용적으로는 ‘신앙에로의 부르짖음’과 ‘신실성과 회개로의 요청’이 근간을 이루었다. 한 마디로 인종차별정책은 복음진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죄악으로 ‘신앙고백적 결단’(status confessionis)을 요청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신앙고백은 인종차별의 죄악을 분명히 인식하며 민족적 결단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12)
 
그렇게 거창하지 않게 총 5항목으로 이루어진 「벨하 신앙고백」은 세 가지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 교회의 하나됨과 모든 민족과 나라들 사이의 하나 됨(Unity), 둘, 교회와 사회의 화해(Reconciliation), 셋, 하나님의 정의(Justice)이다. 「벨하 신앙고백」의 머리말은 “우리는 모든 개혁교회들을 위해 이 고백을 하는 것이지 단지 우리들만의 것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세계 개혁교회에게 뭔가를 행동하기를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개혁교단인 CRC, RCA, 그리고 PCUSA가 이「벨하 신앙고백」을 개혁교회의 4번째 세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한국의 교회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통일을 맞이했을 때, 아니 오늘의 복음진리가 도전받고 있는 분단의 극한 상황에서 마땅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을 간절히 기도하며 지금부터 서라도 통일한국에서 하나님과 세계교회 앞에 회개하며, 감사하며 그리고 우리의 비전을 담아 고백할 「한국 신앙고백」을 마땅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한국 신앙고백」을 위한 Task Force(TF)를 구성해야
 
이를 위해 총회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공교회적으로 「한국 신앙고백」을 위한 TF(Task Force)를 구성할 것을 간곡히 제안하는 바이다. 이 TF는 그 분명한 하나의 목적을 위하는 일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비로소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할 숙제를 감당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중요한 신앙의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수 백명의 사람들에 의해 거의 5년에 걸쳐 완성되었던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가슴 벅찬 남과 북의 하나 됨에로의 비전을 안고 뜨거운 기도 가운데 거룩하고 신중하게 성경적으로 우리의 부끄러운 분열의 과거를 회개하고 청산하면서 모이고 또 모이면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TF의 결성은 결국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불씨, 새로운 한국(New Korea)을 만드는 불씨, 통일한국(United Korea)을 하나님의 공의 위에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비로소 한국교회가 남북의 분단이 오늘 한국교회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이 분단 하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사의 역동적 분수령이 될 뿐 아니라, 세계교회사에 비로소 성숙한 교회로서 한국교회가 인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길 기도한다. 거기다 통일한국에서 선언된 「한국 신앙고백」이 개혁교회가 기뻐하는 세계 신앙고백에도 채택되어지는 교회사의 쾌거를 이루기를 소망한다.     

맺는 말
 
남북의 분단이 한국교회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한국교회에게 시험을 주셨던 하나님은 양과 더불어 이제는 한국교회의 성숙을 요구하신다. 일제 하 3.1운동에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는 21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될 통일한국에 무임승차하는 몰역사적이고 비성경적인 나태하고 게으른 교회로 비판받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무 준비 없이 통일한국에서 세속적 가치관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일을 한다면 한국교회는 제2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을 경고한다. 21세기 한국교회의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이며 한국교회의 가장 무거운 십자가인 남북의 분단 극복에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사랑하며 함께 짐을 지는 진정한 교회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독일 통일이 ‘조용한 개신교 혁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듯이 남북 분단은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험대로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이 시험을 통과할 때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을 기대한다. 현실적으로 남북의 허리를 잡고 힘을 못 쓰게 하는 녹슨 휴전선은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세계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이 이념에 발목 잡혀 있는 부끄러운 형국이 되기도 함을 부정할 수 없다. 사마리아를 향했던 예수님처럼 이제 과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그들을 찾아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천국을 누리는 새 생명의 축제가 북한 땅에도 이뤄지게 하는 데 소중한 역할을 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21세기 한국교회가 이제 성숙한 교회로 세계교회 앞에 사명을 감당하며 헌신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초막 셋을 짓고 적당히 안주하며 호화 호식하는 교회로 전락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2500만 인구를 가진 북한의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억압을 모른 체하며 한국교회가 몰역사적이고 무정한 태도를 계속 가진다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겨 세계사적 과업을 한국교회가 아닌 다른 일꾼들을 불러들여 사용하실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인내를 깨닫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지상 최대의 명령에 우선 순종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의 한 쪽을 사랑하여야 하겠다. 하나님이 오늘 한국교회에게 요구하신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름 아닌 원수사랑 임도 기억해야 하겠다. 보다 담대하고 다양하게 한국교회의 북한을 향한 복음적 사랑을 독일교회가 역사적으로 교훈하듯이 펼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는 중 한국교회는 작은 통일을 미리 맛보는 중 자연스럽게 큰 통일을 이루는 주역이 될 것을 기대한다.
 
게다가 통일한국에서 가져야 할 꿈으로서, 한국교회는 교회사적 꿈도 가져야 할 것인데, 그것은 세계 개혁교회를 향한 「한국 신앙고백」을 준비하여 발표하는 것이다. 17세기 영국교회가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총회에서 약 5년 동안 기도로 준비하고 발표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세계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인정되었듯이, 21세기 세계사의 최대 사건이 될 한국 통일을 맞아 한국 장로교회는 넘치는 감사와 감격어린 마음으로 비로소 「한국 신앙고백」을 발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시 한 번 제안하는 바는 그 「한국 신앙고백」을 위한 TF(Task Force)를 구성하여 수없이 나눠진 한국 장로교회가 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한국 통일을 향한 한국 장로교회가 지녀야 할 이 꿈이야말로 세계 교회사적이며, 개혁신학적 꿈이라 하겠다. Soli Deo Gloria!
 
다시 한 번 졸고를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적 비전을 가져라
2. 하나님의 숙제를 상기하라
3. 성경적 통일론을 만들어라
 - 십자가의 복음
 - 사마리아로 들어가라
 -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라
 - 교회를 슬림화하라
4. 독일통일에서 교훈을 얻어라
5. 한국교회는 통일을 준비하라
 - 탈북주민의 교회정착을 실현하라
 - 사람의 통일을 준비하라
  -「한국 신앙고백」(The Korean Confession)을 만들라
  - TF팀을 구성하여 이 신앙고백을 준비하라
 
참고문헌
 
Roy Richard Grinker, Korea and Its futures: Unification nd the Unfinished War,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8, 47-48.
 
김영재. 『한국교회사』, (이레서원, 2004).
박명수.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과 연합의 방안”, 한국복음주의협의회, 2012년 2월 주제발표문.
박정수. 『성서로 본 통일신학』, (한국성서연구소, 2010).
전우택. 「사람의 통일을 위하여」, (서울: 오름, 2000).
조용관. 김병로, 『북한 한 걸음 다가가기』, (서울: 예수전도단, 2002).
주도홍. 『독일통일에 기여한 독일교회 이야기』,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주도홍. 『통일, 그 이후』, (서울: IVP, 2006).
한국찬송가공회. 「찬송가」, (서울: 예장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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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5/04 [18:5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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