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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21 [10:02]
보수, 성찰의 틈을 열어라!
보수는 대중과 민심에 대한 감각을 열어야
 
김상재
▲     © 김상재/ 보수는 대중과 민심에 대한 감각을  열어야---

천국과 지옥, 교회와 세상, 죄와 의, 성과 속, 사물과 사태들을 대칭적인 이분법으로 갈라 보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지반이며 교회의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세계관이다. 이 내적 기제로 하면 만물을 쉽게 역동적인 대칭으로 치환할 수 있고 그 대별된 상하, 좌우의 편들을 걸리는 한 축으로 유능하게 변개할 수 있는 기능적인 장점을 열매로 경험할 수 있다. 이 역동성은 존재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성경의 기본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매우 소중한 것이며 반드시 지켜져야 할 신학적 유산임을 우리는 믿는다. 아무리 사유와 선악의 경계를 흐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창궐해도 여전히 우리 인간은 죄와 절대 악을 벽에 대고 거울처럼 대면하고 있으며 행복과 선을 위해 운명적인 선택을 수행해야만 할 때가 늘 있는 것이 현실임을 직시할 때 우리는 교리적인 믿음을 떠나서도 항구적으로 이 성경의 내적 의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시대와 상황은 변해도 유실되지 않는 근본적 믿음의 초월적 권위는 이 지점에서 뿌리를 내리고 좌표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디지털 문명의 첨예화, 탈 해체를 극한으로 까지 밀고 가더라도 유한한 인간은 여전히 죽음과 무의 운명과 싸우고 있으며 그 삶에 밀려 표류하는 피곤한 영웅들이 아닌가? 흔들리지 않는 경계를 역동적으로 딛고 초월적으로 도약하고 변개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지반에서 가능함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문화가 아닌 신앙은 이렇게 이 초월의 지렛대에서 비로소 계시되고 경험된다는 것은 계시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며 그러한 중요한 이유들로도 이것은 복음주의가 보물처럼 공유하고 있는 자산 그 자체로 누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원칙적인 이분법을 충분히 황금의 명예로 존중하고서도 오늘 우리 교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이분법을 의심하고 회의할 때가 왔다는 것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법 자체를 회의한다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수록 더욱 이분법을 소중하게 존중하되 이 안으로의 건강성을 담보로 어떤 결핍의 이분법에 대하여 보다 열린 필터를 옵션으로 장착해야 한다는 자성적 질문에서의 회의를 이름이다. 오늘날 뜨겁게 기도하고 부르짖는 부흥의 바다를 이루고도 교회의 권위가 미숙한 권위로 행사되고 표현되고 있는 사태는 우리에게 이 더 적극적인 의문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런 위대한 이분법을 두고도 우리사회에서의 이분법은 왜 발에 밟히는 이분법이며 그 이분법은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 그리고 이분법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이분법이어야 하는가? 하는 반성적 질문들이 그렇게 해서 발전되는 것이다. 

 먼저 이분법을 이분법으로만 하는 근본적 믿음에서는 스스로를 향한 성찰이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너무나 쉽게 그 대칭의 경계에 절대를 투사하는 극단적 이분법에는 그 공간에 오직 유와 무만 있을 뿐 그 중첩되는 상호 공유지대에 대한 사유의 틈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이분법만의 파토스로는 세상을 구원할 열정에 사로잡힐수록 세상은 유실될 적극적인 무로 좁혀지고 대칭적으로 믿음은 적극적인 절대 유로 비약, 불필요하게 결핍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발촉점이 될 수 있게 한다. 세속적 내적 우주에 대하여 절대 유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은 우리가 늘 권장하는 믿음이지만 이 좋은 것도 이렇게 균형의 선을 과월, 극단적인 유가 되면 신앙은 모든 사태에서 만능을 부리는 전능의 권위로만 유통된다. 신앙은 분명 절대이지만 그 절대적인 능력은 반드시 이 현세 내에서 물량적인 해결사의 의미로 투사되는 그러한 마술적 절대는 아니라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인데 긴 역사에서 비정상이 정상을 눌러버린 아픈 우리 사회의 내면에서는 그 절대가 쉽게 비인격적인 물량의 절대로 과잉 신앙된다. 상황을 넘어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어떤 의미론적인 가치로 공유되는 절대적인 신앙은 이 협곡에서 무능자의 넋두리쯤으로 약화된다. 곧 절대도 상대를 대칭으로 일정한 거리에서 가로놓이는 진정한 상호역학적 절대가 아니라 상대의 의미조차 허용하지 않는 무 성찰의 절대만이 절대가 되는 왜곡의 부작용이다. 

중첩의 틈이 없는 이 극단의 이분법에서는 그러므로 오직 그렇게 선을 가르는 의협과 언어의 힘에 대한 어떤 몰입으로 휘어진다. 그 과도한 긴장 속에서 세속의 도전이 거셀수록 더욱 선은 두터워지고 절대라고 주장되는 목소리는 더욱 볼륨이 커지는 악순환의 대립적 압축이 점점 좁아지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절대가 충분히 생산적이지 않는 것은 그 급직선에는 일말의 비판과 회의의 공간도 용납되지 않는 폐쇄성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교회와 강단의 권위가 내려앉으면 교회와 강단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그렇게 진리의 권위를 무시하는 세상과 시장의 문제이며 패역적 불신앙의 문제로 투사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정적인 반응의 문제들에 교회는 더욱 더 절대로 톤을 높이는 내면이 고착 되고 그 극단적 대칭에서 어떤 문화적 국면에서는 상황을 굴절되게 오판하는 과잉으로까지 쉽게 돌출 터져 나오게 된다. (오늘날 뜬금없이 교회가 정치력을 확보, 혼탁한 세상을 적극적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어떤 교계인사들의 논리류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심리기제에서 촉발된 것이 아닐까? 권위의 유실이라는 위기는 이렇게 이분법에서는 절대를 완전하게 독점하고 있으므로 안으로 반성되지 않고 쉽게 이념의 위기, 정치적인 위기, 밖의 문제로 투사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쉽게 등장하는 사회 윤리적 변들은 그것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어떤 기존의 정치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얹혀 동원되는 시대착오적인 논리들로 이런 사태는 스스로 사유가 없는 근본성에 함몰되어 있음을 반증해 준다) 

이 쏠림현상이 거듭 건강하지 못한 것은 이 패러다임에서는 민심과 대중에 전혀 무감각해지는 의식이 생산된다는 점이다. 이 과월의 이분법에서는 신앙의 총체적인 범위와 한계를 이해하는 폭이 치명적으로 좁아지고 그 협착선은 또 세상을 해석하고 복음과 문화의 통전적인 상관관계에 대해 생산적인 태도를 경험하게 하는 합리적인 사고와 생각 자체를 처음부터 배태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협착된 내적 기제에서는 오직 믿음의 권위라고 하는 절대해답에 대한 신앙적 몰입만이 작동되기 마련으로 그 틈에 일반은총이라는 응용과 적용의 중간지대는 그러므로 쉽게 부정된다. 이런 기제의 흐름에 밀리다 보면 그 블랙홀의 중력 안에서는 현실과 문화에 대한 감각과 상황에 대한 통할 수 있는 이해력은 사실상 촉발되기 어렵다. 

신앙이라고 하는 해답은 영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의 결정적 해결점으로 그 궁극적 해답을 두고도 해답의 몸 수면 아래에 붙어있는 세계내적 문제는 문화라고 하는 몸체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균형적인 시각은 그 현실도 복음의 질서아래에서 존중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일반은총도 소중하게 안고 있는 성경의 중요한 뜻이라고 우리는 정리하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균형이 함몰되면 중요하게 확보되어야 할 머리아래 허리는 처음부터 계산에서 빠지고 아예 눈에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몸은 없고 머리만 있는 믿음, 그러므로 그 이분법의 파토스는 그 절대에 대한 권위충동으로 중간지대를 가로지르지 않고 그만큼 바로 세속의 현실로 직접 투사되는데 이 비 균형인 비약과 과잉에서 교역자의 언어에 사회문화적으로 치기어린 견해와 발언들도 쏟아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오늘 우리 교회가 가장 뜨거운 진리에 대한 열정과 신앙의 바다를 체현하고도 사회를 향하여 건강한 감각과 촉수가 거의 작동되지 않고 오히려 자주 오판을 일삼는 것은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일부 대중적 보수는 이렇게 소통과 성찰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 의식 공간에만 고착된 채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은 복음과 세상, 문화의 범주와 그 경쟁력의 권위까지 가로지르는 결론, 경쟁력으로서의 이원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충분한 민주적 절차를 가로지르지 않고 언표되는 신본주의가 손쉽게 독재의 수준에서 오용될 수 있듯이 일반은총의 합리적 중간지대를 건강하게 관통하지 않는 이분법은 이렇게 손쉽게 무지와 결핍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정직해져야 한다. 이런 결핍의 의식기제들이 진리라는 권위의 외피를 입고 교계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홍수와 나팔로 외쳐질 때 증폭될 수 있는 혐오와 어떤 불량의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 

사실 현실적으로도 사유의 잠정성과 유예---흐물거리는 선악의 경계에 피로현상을 보이고 있는 탈 해체적인 문화현상에 대해 다시 절대의 축을 탐구하는 작금의 인문적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성경적인 의식기제를 주목하게 한다. 죄와 의, 진리와 비진리,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면도날처럼 가르는 이분법적 믿음은 이와 같이 시대를 뛰어넘어 항구적인 공명 내지는 살아있는 기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와 그 심대한 자극적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새로운 차원의 의식과 사회를 더욱 앞으로 가로질러 그 대상을 포월하고 치유하는 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현대의 기독교는 자기 확신적 깊이로 고유의 이 이분법의 대칭이 밀어 올리는 역동적 초월을 안으로 심화시켜야 한다.(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더 깊은 이원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이분법은 다시 말씀과 건강한 신학으로 돌아간, 깊은 자각과 성찰을 안과 밖으로 투사하는 이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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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4/03 [15:3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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