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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2.08 [18:01]
왕의 친구가 된 자, 바르실래
성경본문: 사무엘하 19:31∼39
 
김윤희

잠언에 보면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는 말씀이 있다. 그러한 자가 어떠한 자인가? 바로 본문에서 소개된 인물이다. 본문은 ‘압살롬의 반란 사건’(삼하 15∼1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사건이 일단락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결미를 장식하고 있다. 압살롬은 죽고 다윗은 망명의 생활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그의 궁전인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게 된다. 일종의 정치적 쓰나미를 경험한 다윗에게 그가 트랜스 요르단(요단강 동편) 쪽에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실로 많은 무리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나오는데 그중에 시므이가 있었고 므비보셋도 있었다. 모두가 정치적인 목적들로 얽혀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인물이 바르실래이다.

서론은 바르실래가 그의 고향 땅에서 내려오는데 그 이유는 왕을 요단을 건네도록 배웅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31절). 결론에 보면 왕이 요단을 건네고 바르실래가 고향 땅으로 돌아감으로 마치고 있다(39절). 결국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여 같은 내용으로 마침으로 본문이 하나의 내용을 결정짓는 단위(31∼39절)임을 알려 주고 있다. 구조를 보면 자연스럽게 본문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난다(c에 있음). 이러한 구조를 중심으로 본문의 내용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서론(31∼32절)
본문은 원어의 순서대로 보면 바르실래로 시작한다. 그는 길르앗 사람이며 그의 고향이 로글림임을 밝히고 있다. 로글림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다윗에게 온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왕을 배웅하여 요단을 건네기 위해 요단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가 어떠한 자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팔십 세이다. ‘매우 늙어’라는 표현과 함께 그의 육체적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그는 ‘거부’(巨富)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다윗과 어떠한 인연이 과거에 있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한(‘provide’)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하나임 사건은 사무엘하 17장 27∼29절에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마하나임이라는 장소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후원자 세 명이 구원자들처럼 나타나서 다윗과 그의 군대를 대접하였다. 나하스의 아들 소비는 이곳에서만 언급되었으므로 누구인지가 확실치 않다. 마길은 므비보셋의 후원자로서 그를 돌보아 주고 있었던 인물로(삼하 9:4∼5) 다윗의 므비보셋에 대한 대우에 고마움을 느꼈을 인물이다. 그리고 언급된 인물이 바르실래이다.

이들 세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과의 접전을 목전에 두고 가장 지쳐 있었을 때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 자들이다. 특히 압살롬과의 전쟁은 요단강 동편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므로(삼하 17:26) 전쟁의 결과에 따라 이 세 사람의 운명도 결정되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윗과 그의 군대들의 ‘시장과 곤함과 목마름을 돕기 위해’ 음식뿐 아니라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가지고 나왔다.

마하나임이라는 장소는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에 천사들의 무리가 나타나서 용기를 주었던 곳이다(창 32:1∼2). 다윗도 이곳에서 그의 삶의 위기에서 천사들과 같은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기에 다윗의 시편의 많은 영감들이 이러한 경험들을 토대로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다윗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이다.

그러한 바르실래가 압살롬과의 전쟁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는 다윗을 보기 위하여 다시 마중을 나온 것이다.

다윗의 요청(33절)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供饋)하리라”고 제안을 한다. 이것을 다윗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요청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바르실래는 부자고 트랜스 요르단 지역의 유지로서 그를 예루살렘에서 요직에 앉힌다면 그 지역의 지지와 협조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다윗의 요청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순수한 보은의 차원임을 알 수 있다. 32절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32b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바르실래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b 예루살렘에서 내[다윗]가 너[바르실래]를 공궤하리라

즉, 다윗은 바르실래가 마하나임에서 그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와 충성에 대해 보답해 주고자 순수한 제안을 한 것이다. 저자는 다윗의 언어 속에서 바르실래가 한 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형태를 취함으로 다윗의 동기의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신세에 대한 보답을 다윗은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다윗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왕으로 표출되어 있다.

바르실래의 응답(34∼37절)
이에 대하여 바르실래가 길고 장황한 대답을 한다.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생각해 볼 수 있다.

(1)바르실래의 대답 (34a절)
다윗의 요청에 대하여 바르실래가 말문을 연다: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2) 첫 번째 변호 (34bc~35a절)
바르실래는 첫 번째 변호로 수사학적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는 먼저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즉 다윗의 ‘예루살렘으로 가자’는 제안에 대한 정중한 거절이다.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밝힌다. 이것은 32절에서 이미 저자에 의해 밝혀진 바로, 바르실래가 어떤 핑계나 둘러대는 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두 번째 변호 (35bcd절)
두 번째 변호에서도 세 번의 수사학적인 질문형식을 통하여 다윗이 제안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provide’)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다윗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공급하여 준다고 해도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겠습니까?”(첫 번째 질문)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좋고 흉한 것은 그가 감각적으로 이러한 것을 즐기고 느낄 만큼 예민하지 않으며 이제 많은 것들이 둔감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두 번째 질문)라고 묻는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먹는다고 해도 그의 미각도 둔해 있음을 토로한다. 맛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고 또한 그에게 그러한 것이 큰 의미가 없는 나이가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세 번째 질문)라고 질문한다. 그의 청각도 이러한 것을 즐길 만큼 좋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노령으로 인해 여러 감각 기관들이 둔해 있음을 이야기함으로 다시 한번 다윗의 제안에 정중하게 자신의 처지와 연결시켜 거절하고 있다.

(4)세 번째 변호(35e∼36ab절)
세 번째 변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찌하여’로 반복되는 구절의 대비다.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와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의 대칭구조이다. 즉, 바르실래는 왕이 ‘자신에게 상으로 갚으시는 것’이 ‘왕에게는 오히려 누를 끼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제안대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바르실래는 지적하고 있다. 이 세 번째 변호에서는 다윗이 33절에서 “나와 함께 건너가자”에 대한 답으로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 뿐이어늘”로 대답한다.

다윗이 요단을 건너가자고 한 의도는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지만 이제 바르실래는 예루살렘까지 가는 것은 거절하지만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까지가 자신이 바라는 바임을 밝히고 있다. 실로 다윗의 요청에 대하여(33절) 바르실래는 한번도 직접적으로 ‘no’라는 대답은 하지 않으면서도 조목조목 다윗의 제안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다윗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면서, 자신은 갈 수 없는 이유를 진실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에 다윗은 간단히 요?! 뽀償嗤? 답은 이토록 길게 주어졌다. 노인의 지혜와 덕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5)바르실래의 요청(37절)
이제 그의 변호를 마친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두 가지의 요청을 한다. 한 가지는 자신에 관한 것이다.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고 요청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가지 않겠다는 또 한 번의 간접 거절이다. 그러면서도 바르실래의 노령에 대한 해결책이다. 공교롭게도 바르실래의 이 표현은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는 표현과 줄친 부분이 원어상 거의 동일하다.

이것을 통하여 저자는 두 사람을 은근히 대조시키고 있다. 다윗 왕을 대적했던 아히도벨의 운명은 외롭고 비참했으며 자살에 의한 조기단절이었다. 그러나 다윗을 도운 바르실래의 죽음은 복되고 평화롭고 조화로우며 장수의 복을 누린 생의 대미(大尾)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진정으로 바르실래가 원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부모의 묘 곁에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살다가 묻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요청이다.

두 번째로 그는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라고 하며 또 한 가지의 요청을 한다. 김함과 바르실래의 관계는 불분명하나 많은 학자들이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다. 헬라어의 사본중의 하나도 김함을 바르실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고 요세푸스라는 1세기 때의 유대인 역사가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에 의거해 그를 바르실래의 아들이라고 본다. 또한 그러한 해석이 문맥에서도 자연스럽다(참고: 왕상 2:7,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바르실래는 자기 대신에 자신의 아들을 다윗과 함께 보냄으로 사실 다윗의 요청에 대해 다른 방법으로 수용을 한 것이다. 비록 자신은 가지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다윗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다 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다윗의 동의(38절)
다윗은 바르실래의 진심 어린 거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의 새로운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다윗은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내가 너의 좋아하는 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고 답한다. 이 대답도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난다.

다윗은 자신의 원래 요청의 형식에서 바르실래의 위치에 김함을 대치함으로 바르실래와 자신의 요구 사이의 절충안을 택한 셈이다. ‘대화와 타협’의 좋은 모델이다. 거기에 더하여 다윗은 다시 한번 바르실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에게 호의를 나타낸다.

즉, 바르실래는 다윗의 뜻에 김함을 맡겼으나 다윗 왕은 바르실래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지 않고 바르실래에게 양도한 것이다. 또한 다윗 왕은 자신의 한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한 마디를 더한다.

첫 줄의 의미를 두 번째 줄은 더욱 보강하여 완성시키고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다윗의 바실래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그의 말 한 마디마다 배어 있다. 바르실래 또한 다윗에 대한 충성심과 존대함으로 예우를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치적이나 인간적인 득실에 관계없는 순수한 관계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결론(39절)
바르실래와의 만남은 여기에서 일단락 지어진다. 본문은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바르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비니 저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왕도 건너가서”라는 표현에서 ‘왕’이 강조되어 있다. 드디어 다윗이 요단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데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또한 요단을 안전하게 건너는 것을 보는 것이 바르실래가 원한 자신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 임무를 완성하고 그는 왕에게 복을 받고 자신이 원한 대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다윗은 바르실래에게서 받은 호의를 선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축복을 주었고 자신도 다윗에게서 축복을 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순수한 우정과 신뢰만이 있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그 어떤 불순한 동기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처음에 인용한 잠언의 말씀을 다시 보자.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바르실래만큼 이 구절의 좋은 예가 있겠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베푸는 은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바르실래는 자신의 부(富)를 가지고 베풀 줄 아는 은사를 지닌 자이다. 그의 행동과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진심으로 다윗 왕을 섬겼으며 그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세기에 수도사 베네딕트는 누구든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는 마치 그가 예수님이 손님으로 오신 것처럼 (christ-guest) 대접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 35절의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규칙을 만든 것이다. 바르실래는 이러한 정신을 실천한 자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베풀 때에 필요한 자세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대접하듯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섬기고 베푼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물론 바르실래가 섬긴 자는 ‘왕의 신분’에 있는 자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르실래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다윗의 삶에서 이렇게 순수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은 인간 관계들이 이익 속에서 얽히고 꼬여 얼룩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순수한 나눔과 베풂이 희귀하게 여겨지는 상황을 보며 우리부터가 이러한 영역 속에서 성(聖) 베네딕트의 정신을 살려 나가야겠다.

둘째, 자족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바르실래는 나이가 많았고 충분한 부(富)가 있으므로 부족할 것도 바랄 것도 없이 많은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와 부가 항상 그러한 면모를 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물질이 풍성하면 할수록 더욱 세상적인 욕망과 가치관에 더 집착할 수 있다. 바르실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의 그러한 욕망에서의 자유함과 삶의 균형 잡힌 성숙함을 엿볼 수 있다. 어떤 학자가 지적한 대로 그는 그야말로 ‘다이나믹한 삶 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대학생선교회(c.c.c.)의 창설자 빌 브라잇 박사님의 주위에 있는 스텝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살아계실 때 ‘어떻게 전도하며 살아가는갗를 가르쳤고 마지막으로 병상에 누워계실 때에는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갗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갗를 가르치셨다고 들었다. 이것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모든 욕구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 특히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자’(빌 4:11)들이 보여 주는 멋진 삶의 철학이요 모습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은혜를 아는 자가 되는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다윗의 미덕중의 하나는 자신에게 충성하고 은혜를 베푼 자들에게 보상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누구인들 그러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단순히 ‘빚을 청산하는 의미’에서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남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보답하려 하는 순수한 마음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후계자 솔로몬에게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왕상 2:7)라고 임종 시에 ‘은혜를 베풀도록’ 부탁한 유언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윗은 끝까지 은혜를 잊지 않는 의리와 신의의 면모를 보여 준다. 또한 예레미야 41장 17절에 보면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김함의 거처’란 뜻으로 다윗이 바르실래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그의 아들인 김함에게 땅을 하사하여 그 곳이 ‘게롯김함’으로 불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호의를 베풀 줄 아는 노인과 은혜를 아는 왕의 ‘친분관계’는 점점 메말라 가는 인간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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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1/26 [10:3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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