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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1.22 [19:02]
구원을 약속받은 자 에벳멜렉
예레미야 38:1∼13; 39:15∼18
 
김윤희

터무니없는 듯한 상황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하나님께서 현재 어떤 선지자를 보내어 중국이나 미국에(어느 나라라도 좋다) 절대 굴복하고 숭중(崇中)이나 숭미(崇美)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그런 예언자가 어디 있겠냐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현재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를 외치는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아마 그런 예언자가 있다면 돌팔매로 얻어맞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 예언자는 당장 매국노로 인정되어 그를 체벌하라는 촛불시위가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예언자도 없고 예언의 내용도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의 내용은 위에 언급된 것보다도 훨씬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며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메시지 때문에 몇 번씩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 내용이 본문에도 잘 나와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38:2∼3; 비교: 21:7, 9∼10; 34:2, 22; 37:8 등).

여기에서 갈대아인은 바벨론을 가리킨다. ‘칼, 기근, 염병’은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 심판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예: 14:12; 21:7, 9; 24:10; 27:8, 13; 29:17~18; 32:24; 34:17; 42:17, 22; 44:13). ‘생명이 노략물’이란 말은 목숨을 전리품으로 건진다는 뜻이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길이라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이다. 열심히 싸워 난국을 극복하자고 해도 역부족인데 무슨 망국적인 메시지란 말인가? 이러한 메시지의 내용을 듣고 가만히 있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에 순종할 의무가 있었다(신 18:19). 또한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유다의 멸망이 곧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고통과 비참함이 그의 눈앞에 선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이다. 이러한 갈등이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다.
 
예레미야의 갇힘(38:1∼6)

본문은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38:1)으로 시작한다. 맛단의 아들 스바댜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는 예레미야 20장 1절부터 3절까지에 나오는 바스훌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나오는 바스훌은 제사장으로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듣고 분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리고(율법의 요구에 따라 40대를 때렸을 것이다:신 25:3; 고후 11:24) 형벌을 가했던 자이다. 이미 예레미야를 학대한 경험이 있는 자의 아들이 여기 동참한다. 셀레마의 아들 유갈은 37장 3절에 철자가 약간 다르게 표기되기는 했지만 동일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21장 1절에 언급된 인물로 왕의 심복으로 예레미야에게 심부름을 갔던 자이다.

이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청한다. 시드기야(597∼586 bc)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이제 유다의 마지막을 향한 초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임을 믿지 못하는 무리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식견에 의지하여 예레미야를 죽이기를 꾀한다.

그들의 명목은 4절에 잘 나와 있다. 두 가지의 근거를 대고 있다. 하나는, 예레미야가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는 국가의 평안(샬롬)을 구치 아니하고 해(害)를 구한다는 것이다. 국가안보를 해치는 자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항복이 예레미야의 주장이라면 거기에 맞선 민족주의적인 저항과 국가의 안위와 안보가 이들의 항변이다. 하나님의 뜻과 국가정책의 충돌이다.

실제로 당시의 바벨론의 위세로 보아 유다가 저항한다는 것은 거의 자폭 수준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것이며 지혜로운 것이다. 바벨론에 저항하는 것은 잘못된 정치적 판단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국제정치와 신학이 묘하게 협력하여 유다를 압박하고 있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살 길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유다를 향한 심판이라는, 묘한 도식이 성립되어 있었다.

유다 정치인들과 백성들이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혼돈스럽고도 위험 부담이 큰 메시지를 예레미야는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믿음’이 열쇠이다.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가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의 결정도 정치적이지만 동시에 신학적이다. 그 사이에서 시드기야 왕은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는 비굴한 답변으로 예레미야를 그들 손에 내어 준다. 시드기야의 언어 속에서 당시 실세(失勢)가 어디에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시드기야가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기보다는 그들의 압력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제 예레미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6절은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 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근동 지방에는 물을 저축하기 위하여 이러한 구덩이를 파서 이용했는데 입구를 좁게 하여 구멍을 덮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구덩이 안의 공기가 탁하고 바닥이 진흙으로 진창만 남아 있어 예레미야가 빠질 정도였다는 것은 그가 오래 버티기 힘든 상황임을 전해 주고 있다.

왜 구덩이에 넣는 방식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것이다. 죽을 수 있는 환경에 예레미야를 던져 넣은 것이다. 굶어 죽든지 질식하여 죽든지 진흙에서 체온조절에 실패해 범벅이 되어 죽든지 예레미야는 죽게 되어 있었다. 동시에 누구도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의 마지막 모습이란 말인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구덩이 속에 던져진 예레미야를 누가 구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당시 세력자들인 방백들이 한 일에 누가 감히 도전한다는 것인가?
 
예레미야의 구원(38:7∼13)

에벳멜렉이라는 인물은 갑자기 등장한다. 전에 언급된 적도 없다. 그는 왕궁 환관이요 구스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환관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내시라는 의미도 있고 관리(official)라는 뜻도 있다. 요셉이 애굽에서 만난 보디발도 같은 단어를 사용했는데 거기에서는 ‘시위대장’으로 번역되어 있고 그가 내시가 아닌 것은 그의 아내로 보아 분명하다(창 39:1). 한국말 번역은 전자의 의미를 따르고 있다. 구스는 이디오피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벳멜렉은 ‘왕의 종’이란 뜻으로 그에게 주어진 히브리어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졌음을 듣고 왕을 알현한다.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베냐민 문은 시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거기에서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 분쟁을 해결하고 재판을 행했던 곳으로(삼하 15:2∼4; 잠 22:22; 암 5:15) 에벳멜렉이 쉽게 왕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왕이 정의를 수행하는 자리에 앉아있었으나 실제로 그가 예레미야에게 한 일은 극히 정의롭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에벳멜렉은 왕에게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9절)고 고한다. 짧지만 확실하고 결정적으로 이슈에 접근한다. 두 가지로 왕을 설득한다. 우선 정치적인 압력 행사에 왕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한 무리들을 가리켜 에벳멜렉은 주저없이 그들의 행함이 악함을 지적한다.

사실 왕도 그들에게 동조하여 내린 자신의 명령이므로 잘못하면 에벳멜렉은 ‘무엄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예레미야 편에 선 또 다른 매국노라는 딱지를 둘러쓰고 선지자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수도 있으며 방백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도 있음에도 그에게 주저함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지금 베냐민 문에 앉아 재판을 하고 있는 왕이야말로 옳고 그름을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일을 에벳멜렉이 대신하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예레미야가 죽을 것이라는 긴박한 현실을 일깨워 줌으로 왕에게 자극을 주고 있다.

시드기야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일까? 아니면 주로 압력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전형적인 우유부단의 성격자인가? 아니면 본인도 때마침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가 기회가 오니까 즉각 행동에 옮긴 것인가? 어쨌든 시드기야는 즉시 에벳멜렉에게 명령을 내린다: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10절)고 지시한다.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장면이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다: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서 헝겊과 낡은 옷을 취하고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줄로 내리우며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네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 대라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11∼13절)고 되어 있다.

헝겊과 낡은 옷은 예레미야를 들어 올릴 때에 그의 몸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다. 이 장면은 감동적이면서도 처량함이 느껴진다. 예레미야는 그토록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쳤지만 남은 것은 내려진 낡은 헝겊을 댄 줄에 자기 몸을 의탁하여 간신히 구덩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자기 민족은 자기를 구덩이에 던졌는데 그를 구해 준 자는 이방인이었다. 이 이방인 에벳멜렉은 왜 예레미야를 구해 주었을까? 그토록 정치적인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 구해준 이유가 무엇일까? 본문은 여기에서는 답을 주고 있지 않다.
 
에벳멜렉의 구원(39:15∼18)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9장 본문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39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시드기야의 사로잡힘(1∼10절), 예레미야의 석방(11∼14절), 그리고 에벳멜렉의 구원(15∼18절)을 다루고 있다.
 
먼저 시드기야 왕이 사로잡힌 부분을 보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쳐서 함락시킨다(586 bc). 시드기야는 야간 도주하다가 뒤쫓아온 바벨론 군사들에 의하여 사로잡힌다. 그 결과는 본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바벨론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하였더라”(5∼7절)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신학적인 설명을 붙이거나 교훈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더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것이 왜 일어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드기야 자신이 자초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우유부단하였고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대로 따르기를 주저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지적인 저항으로 일어난 결과임을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시드기야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국가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것일지언정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수 있는 희망은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개인의 의지적인 아집과 불신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기에 클레멘트(clements)라는 학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진실로 인간-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지 미리 각본된 내용이 아니라고 평했다.

그 다음은 선지자 예레미야 차례이다(11∼14절). 구덩이에서 나와서도 계속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는 드디어 석방이 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해방시킨 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벨론 왕이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11∼12절)는 명을 내린다. 바벨론에서는 예레미야를 ‘친 바벨론 자’로 평가하고 그의 공로를 인정한 것 같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라는 것이 그의 메시지의 핵심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외쳤던 메시지의 결론이 맺어졌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의 석방도 자신의 메시지의 성취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시드기야와 그의 방백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따랐더라면 그들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본문은 예레미야가 진실된 하나님의 선지자(true prophet)임을 증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관심은 뜻밖의 인물로 향한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다. 그 내용은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6∼18절)고 기록하고 있다.
 
메시지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우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대한 심판을 확고히 하신다.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에벳멜렉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알리신다. 또한 에벳멜렉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 짧은 본문 속에(15∼18절) ‘여호와의 말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비슷한 표현이 세 번 반복되어 사용됨으로 계시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망하는 날에 에벳멜렉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신뢰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38장에서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원한 행동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심판과 에벳멜렉의 구원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결국 예루살렘이 망한 이유는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에벳멜렉이 구원 받는 이유는 신뢰했기 때문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39장 전체의 구조를 보면 시드기야의 운명-예레미야의 운명-에벳멜렉의 운명의 3중 구조를 보여주는데 예레미야를 중심으로 하여 시드기야와 에벳멜렉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고 에벳멜렉은 신뢰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운명을 달리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시드기야의 운명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이며 에벳멜렉은 순종의 결과임을 대조시키고 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황폐화되는 비극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여호와의 심판의 와중에서도 이방인이요, 환관이요, 이름 그대로 ‘왕의 종’의 신분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실세와는 무관한 한 개인의 이름이 특별히 거론되었다. 그의 생명이 보장되었다. 예루살렘 성이 망하고 여호와의 전이 파괴되는 대비극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잊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와 그의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이었다. 진정한 아이러니는 본문 속에서는 한 이방인만이 진리를 깨닫고 있었다. 그가 바로 에벳멜렉이라는 자이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저하는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시드기야는 이런 자의 전형이다. 시드기야 왕은 여러 번에 걸쳐 예레미야를 개인적으로 면접하며 그의 말을 확인한다. 38장에서도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분명히 메시지를 전한다(38:17~21). 그러나 끝내 시드기야는 듣기는 들어도 그 말에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니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다. 우리는 되어진 일의 결과를 보며 시드기야의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왜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믿지 못하는지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선지자가 있다면 그의 말을 당장 신뢰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각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드기야에 가깝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감동도 받고 마음에 찔림도 받고 결심도 해 보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사는 모습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느끼지만 세상의 압력에 밀려 우유부단한 결정을 하는 자들이다. 결국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자들이다. 혹시 우리는 시드기야형(type)의 신자는 아닌지 점검이 필요하다.

둘째, 사역자의 삶을 산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예레미야는 충성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든 것이었다. 당시의 정서에 맞지 않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기 없는 선지자요 설교자가 예레미야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끝까지 완수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예레미야는 많은 도전이 된다. 사역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의 모습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점검하며 살아야 한다. 자칫하면 자신이 구상한, 자신이 생각한, 자신의 비전과 포부를 실천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뢰하는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에벳멜렉은 이러한 자의 예로 등장한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행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위험 부담을 무릎쓰고 예레미야를 구한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많은 부담이 따른다. 정직함으로 재정적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말씀의 기준대로 사는 것 때문에 승진의 기회를 놓쳐 버릴 수도 있으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다. 물질도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고민해야 하고, 주위를 돌아보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없는가에 대해 민감하게 살피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또한 의미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에벳멜렉의 구원의 약속을 보며 우리 모두는 큰 위로를 받아야 한다. 결국 그러한 삶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고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준 것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마 10:42; 막 9:41) 믿음의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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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0/30 [10:0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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