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광고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파워인터뷰생활/건강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20.01.27 [05:01]
양이냐, 염소냐? (2)
나균용 목사 칼럼
 
나균용

4. 양이냐, 염소냐? (2)

(마태복음 25:31-40)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25:32-34).

 

1. 양의 특성

1) 첫째는 순종이다. 양은 목자의 명령이 없이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가? 그의 믿음의 첫째가는 특징은 순종이었다. 떠나라 하시니 떠났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 하시니 쫓아내었다.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하시니 그대로 바쳤다. 우리가 말로 전하고 듣고 하기에는 쉬운 것 같으나 실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양은 천성이 그렇다. 자기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쓸 줄 모른다. 야곱도 처음에는 인간적인 수단으로 살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고 나서는 변했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염소였던 때에는 내 맘대로 살았지만, 이제 양이 되면 내 맘대로가 아니다.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을 쓰지 않게 된다.

교회의 회의에서도 모두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자기의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회의가 되겠는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교회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다. 어려운 문제는 깊이 기도하면서 주님께 맡겨야 한다.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고백을 드려야 한다.

 

2) 양은 목자의 뒤를 따른다. 그러나 염소는 목자보다도 앞에 서서 가기를 좋아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주님만 따라간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맡기고 따라가는 사람이 된다. 계시록 14:4에 이 양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래서 염소를 인도하는 목자는 늘 염소를 앞에 두고 자기는 뒤에 서서 따라가면서 슬슬 칭찬을 해 준다고 한다. 그러면 염소는 신이 나서 열심히 간다.

교회의 신자들에도 두 종류가 있다. 물론 칭찬을 해 주어서 기분 나빠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목사보다도 앞에 서서 가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앞세워주지 않으면 심통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목사님은 그런 사람들을 앞세워 놓고 뒤에서 슬슬 칭찬만 해 준다. 그러면 그 사람은 기분이 좋아서 열심히 일을 한다. 헌금도 잘 한다. 목사님 대접도 잘 한다. 그러나 만약에 목사님의 태도가 자기를 좀 안 알아주는 것 같다든지, 또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알아주는 것 같으면 심통을 부린다. 그 뿐인가? 좋은 일에는 자기가 앞장서지만, 궂은일에는 슬쩍 피해버리고 목사님에게 짐을 떠넘긴다. 정말 목사님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양은 목자의 뒤를 따른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목사님을 앞세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궂은일에는 자기가 앞장서서 목사님에게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없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목사와 신자와의 관계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과 목사와의 관계도 똑같고, 주님과 평신도들과의 관계도 똑같다. 주님보다 앞서서 가는 목사나 신자는 염소다. 좋은 일에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는 목사나 신자는 염소다. 우리 찬송가에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라고 하였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3) 양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염소는 높은 곳만 보면 뛰어 올라가기를 좋아한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명예나 권세와 연관된 감투가 아니다. 모든 것이 봉사의 직분이다. 집사다, 장로다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선교회장이다, 여선교회장이다 하는 것도 역시 감투가 아니다. 교회의 여러 부서의 일을 할 때에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재정을 맡기를 좋아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돈이 제일 많은 장로가 교회 재정을 맡아 가지고 10년이 넘도록 다른 사람에게는 넘겨주지도 않고,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목사님 사례비 드리는 일을 마치 자기의 주머닛돈 주듯이 하여서 크게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재정은 가룟 유다가 되는 자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특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라리 청소하는 일이나, 설거지하는 일이나, 차량을 관리하는 일이나 성도들을 핔업하는 일을 즐겨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양이 되어 무슨 일을 맡겨 주시든지 감사함으로 받아서 충성스럽게 봉사할 때에 주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을 네게 맡기리라”(25:21,23).

 

4) 양은 말이 없다. 털을 깎다가 기계가 살을 찢어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심지어 죽일 때에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런데 가축 중에서 가장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놈이 있다. 아마 그 대표는 돼지일 것 같다. 동네가 떠나가라고 악을 쓴다. 소도 도수장에 끌려갈 때에 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왕방울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고 한다. 착한 짐승들이다. 그런데 한자에 착할 선()자가 있다. 그런데 이 글자는 원래부터 그렇게 썼던 것은 아니다. 본래는 양 양자() 밑에 말씀 언()자를 썼다고 한다. 옥편(字典)에 보니까 양 자 밑에 말씀 자가 하나 있는 것이 있고,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것(言言)이 있고,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것(言言言)도 있다. 그런데 그 훈()은 모두가 착할 선이다. 곧 한자로 착하다는 말은 양처럼 말한다.”는 뜻이다. 양이 어떻게 말할까? 아무 말을 안 한다. 그것이 착한 것이다. 성도는 말을 아껴야 한다. 특히 나쁜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5) 화목하다.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물론이지만, 함께 뒤엉킨다. 이것을 군집성(群集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염소는 양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을 싫어한다. 양들이 뒤엉켜 있는 것을 보면 멀리서부터 냅다 달려와서는 뿔로 받아버린다. 그러면 양들이 잠시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염소들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양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고 한다. 만일 양들이 서로 뒤엉켜 있게 되면 밑에 있는 양은 깔려서 죽든지 질식하여 죽게 될 것인데 염소가 와서 흩어주니까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단결하기를 즐겨한다. 그런데 염소 신자들은 이것을 보고 있지 못한다. 어떻게 하든지 흩어버리고 서로 반목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렇지만 실은 그것이 양들을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우리 신앙생활 중에 종종 어려움이 오고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이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더욱 주님 앞에 가까이 가게 되고 성도들 간의 사랑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렇게 모이는 것은 서로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예수님도 합심 기도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라고 하시고는 이어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도 한 사람씩 가게 하시지 않고 둘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다.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믿는 사람들의 생활을 설명해 주는 사도행전 2:46에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고, 히브리서 10:25에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한다.

 

6) 양들은 평화를 사랑한다.

모든 짐승이나 벌레에게도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방어 무기나 공격 무기가 있다. 그런데 유독 양에게는 아무런 공격 무기가 없다. 맹수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되어도 어쩔 수가 없다. 양들은 원수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목숨을 준다.

성도의 생활이 그러하다. 성도들에게는 해하려는 자들이 많다. 다윗같이 위대한 사람도 시편 69:4에서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우선 그의 장인이요, 왕인 사울부터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가? 요셉의 경우에는 그의 형들이 합심하여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크게 될 사람은 마귀가 먼저 알고 이렇게 박해한다.

특히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면 미워하는 자가 많아지고 박해하는 자가 기승을 부린다(15:19). 그런데 예수님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도 있으시면서도”(26:53) 그런 권능을 사용하시지 않고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가셨던 것처럼 성도들도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 한없이 고난만 당할까? 성도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을 알고 원수를 갚는 일도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실 일인 줄 알아서 모두 주님께 맡긴다.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겨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2:19)라고 하였다.

 

7)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은 비단 양들만의 일은 아니다. 모든 가축들이 자기 주인의 음성을 들을 줄 안다. 그런데 양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귀로 알아듣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을 따른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르면 대답하지도 않고, 또한 따르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모르는 귀머거리들이다. 선지서의 제일 첫 번 책인 이사야서는 그 첫머리에서 소는 자기의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1:3)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 7:22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자기들의 생각을 따라서 행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자기들이 모든 일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또는 목자라고 하면서도 그분의 음성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부모나 아내나 자녀들의 음성은 분별할 줄 알고 그들의 요구는 다 들어줄 줄 알면서도 유독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그 음성을 분별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사야 42:18-19에서는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어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아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라고 하셨다.

 

8) 본문에 나타난 양들의 경우에는 일반 짐승인 양들과는 다른 새로운 특성을 하나 설명하신다. 곧 양들은 선행을 잊었다는 것이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25:37-39)라며 반문하였다. 참된 선행은 행하고도 얼른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당연히 해야 할 나의 의무라고 생각할 뿐, 그것이 자기의 어떤 공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행할 뿐이다.

의인은 자기의 선행을 잊어버리고, 반대로 자기의 악행을 늘 기억하면서 회개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자기를 채찍질한다. 그래서 나 행한 것 죄뿐이니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염소는 자기의 악행을 잊었다. 그리고는 반대로 자기가 조금 잘 한 일을 있으면 그것은 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자랑한다.

그러면 무엇이 선행일까?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말씀은 내 형제 중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의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등이 누구일까?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물론 해당은 되겠지만 실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주님의 형제들이다. 우리 기독교 역사상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어느 날, 어느 시에 갑자기 죽임을 당하였다는 정도로만 알고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실은 그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는 훨씬 더 큰 고통의 나날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들의 가족들이 겪었어야 했던 어려움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의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여 헐벗고,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옥에 갇히고 병들고 나그네처럼 유리하며 방황할 때에 과연 누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도와주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미칠 화를 두려워하여 그들을 외면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염소들이다. 그러나 극히 드물지만 양들이 있다. 의인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돕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양이다.

일제 때에 양식이 매우 곤란하던 때가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양식을 다 공출해 가져가고 숟가락 젓가락도 놋으로 된 것은 모두 빼앗기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집사님 댁에 누가 쌀을 한 말을 갖다 주었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런데 그 쌀을 갖다 준 사람이 나가자 얼마 되지 않아서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 집사님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쌀을 가지고 밥을 해서 목사님을 대접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목사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자기 가족들끼리만 밥을 해서 먹을 것인가? 그런데 눈치 없게도 목사님이 빨리 가시지를 않는다. 밤늦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안 가시는 것이다. 아이들도 너무 늦으니까 저녁도 굶은 채 모두 잠들고 말았다. 그제야 목사님도 아무 대접도 못 받고는 그냥 떠나시고 말았다. 그래서 그 집사님도 오늘은 틀렸고, 내일 아침에 쌀밥을 지어서 우리 가족끼리 오붓하게 한번 잘 먹어보자고 생각하고는 잠을 잤다. 그리고는 날이 밝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인이 아침에 밥을 하려고 부엌에 나가보니, 그만 밤새에 온 가족이 깊이 잠든 사이에 낯모를 밤손님이 와서 그만 그 쌀만 반짝 들어가고 말았다. 땅을 치고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목사님을 그 집에 보내시면서 먼저 그 목사님을 대접하라고 상상도 못했던 쌀을 보내주셨는데, 그 집사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인색한 마음으로 대접하기를 거절했더니, 결국은 목사님도 대접 못하고 자기 가족들도 모두 먹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 우리에게도 재물을 주신다. 왜 주셨을까? 주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당신에게 귀한 재능을 주셨다고 생각하는가? 왜 주셨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쓰시라. 아차 하는 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빼앗기는 수도 생긴다. 남다른 귀한 지식을 가졌는가? 주님을 위해서 쓰시라. 하나님이 더욱 큰 것을 주시고 복되게 해 주신다. 세상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 권세 자체를 자랑하지 말라. 주님을 위해 바르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영원한 지옥불 속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일반적인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돕는 사람은 많다. 굶주린 북한 동포들을 도와야 한다. 특히 목숨 걸고 양식과 자유를 찾아 나온 탈북자들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또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다. 우리가 이 복된 양들의 대열에 들어가야 한다.

눈이 열려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의인을 분별하여 볼 줄 알아야 한다. 진리에 굳게 서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많은 의인들을 만나게 되고, 이 생명길의 동행자들을 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도 승리로운 새 길을 걷게 될 것이다.

 

2. 어떻게 하면 양이 될 수 있을까?

 

지난 번 설교에서 말씀한 것에 추가하여 더 말씀한다.

1) 교육을 통하여 양이 된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어도 미국에서 영어만 배우고 한국을 배우지 않으면 모든 것이 미국인화한다. 음식이나 말은 물론이고 생각도 미국화한다. 몸은 한국사람인데, 마음과 생각은 미국사람이다. 우리는 본래 염소로 태어났다. 그러나 교회에서 양이 되는 훈련을 받으면서 양을 바라보며 살게 되면 양으로 바뀐다.

 

2) 친구를 통하여 양이 된다. 당신의 친구를 보아 당신이 양인지, 염소인지를 알 수 있다.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다. 참새는 참새끼리, 독수리는 독수리끼리다. 양은 양과 어울린다. 우리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정이 묻고, 인주를 가까이 하면 붉게 된다.”는 말이다. 잠언 13:20에서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라고 하였다. 좋은 신앙의 동지들을 가져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사람,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아니, 당신이 먼저 그러한 사람이 되기에 힘써야 한다.

 

3) 염소뿔을 잘라야 양이 된다. 뿔이라고 하면 두 가지의 용도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공격 무기로서의 뿔이다. 곧 다른 짐승을 들이받아 쓰러뜨림으로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둘째는 사슴의 뿔처럼 자기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왕들은 아름답게 장식한 왕관을 쓰고 살았다. 그런데 염소와 양의 경우를 보면 염소는 무기로 사용하지만, 양은 아예 뿔이 없든지, 있어도 무기로 사용하지 않았기에 없어졌거나, 동그랗게 말려 있다.

성경에 양각 나팔이라는 것이 나온다. 곧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이다. 양의 뿔은 남을 들이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뿔을 잘라서 나팔로 쓰라고 주신 것이다. 그 의미를 깊이 깨닫자.

당신에게도 뿔이 있는가? 그 뿔을 잘라서 나팔을 만들자. 복음의 나팔이다. 진리의 나팔이다. 새벽을 알리고 백성들을 일깨우는 나팔이다. 시대를 알리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나팔이다.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살전 4:16)가 온 세계에 크게 울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뿔을 잘라서 나팔을 만들어야 하겠다. 목소리를 높여서 잠자는 자들을 깨워야 하겠다.

물론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의 뿔을 잘랐다고 염소가 양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뿔을 잘라야 한다. 곧 남을 들이받아 남에게 상처 주기를 잘하는 못된 성품을 뽑아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하였다.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으로 사는 생활이다. 우리가 모두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좋은 양들이 되자. 아멘.                           

 

<< 나균용 목사 >>

 


*** 타코마 오아시스 교회 설교 목사 나균용 목사 아내입니다.

시인(순수문학), 소설가(창조문예)
저서: <성극각본집 3권>: "나은혜 성극각본집 1권", "행복을 주는 천사 2권", "
"용서의 권세 3권"

<수필집>: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행복한 삶의 고백", 독수리같이 새롭게" "새벽단상"

미디어 한국 칼럼집 :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
시 집 : "물 긷는 여인들"


<단편소설집>: "황금종이 울리는 길"

*** 워싱톤 주 미디어 한국 칼럼리스트(현)
*** 아틀란타 크리스찬타임스 칼럼리스트(현)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20/01/08 [16:49]  최종편집: ⓒ newspower
 
관련기사목록
[나균용 목사] 새 사람이냐, 옛 사람이냐? 나균용 2020/01/24/
[나균용 목사] [생활설교]심판하는 자냐, 심판 받는 자냐? 나은혜 2020/01/15/
[나균용 목사] [생활설교]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랴? 나은혜 2020/01/15/
[나균용 목사] [생활 설교] 부자(富者)냐, 빈자(貧者)냐? 나은혜 2020/01/15/
[나균용 목사] [생활설교]하나님의 집이냐, 우상의 전이냐? 나은혜 2020/01/15/
[나균용 목사] [생활 설교] 빛이냐, 어둠이냐? 나은혜 2020/01/15/
[나균용 목사] 양이냐, 염소냐? (2) 나균용 2020/01/08/
[나균용 목사] 예수냐, 바라바냐? 나균용 2020/01/08/
[나균용 목사] 양이냐, 염소냐? (1 ) 나균용 2020/01/08/
[나균용 목사] 하나님의 말씀이냐, 사람의 계명이냐 나균용 2020/01/08/
[나균용 목사] 성령의 열매냐, 육체의 일이냐 나균용 2020/01/08/
뉴스
연재소개
김준곤 목사의 잠언
연재이미지1
양이냐, 염소냐? (2)
[김준곤 목사 잠언]존 낙스의 기도처럼
[송년기도문]한 해를 보내는 거룩한 순간에
[김준곤 목사의 잠언]소유개념을 바꾸자
[소강석 목양칼럼]큰 바위 얼굴을 품다
[김준곤 목사의 잠언]깜짝 놀랄 그날
[김준곤 잠언]기도의 졸업생은 없다
칼빈의 제네바 성시화 운동(13)
[김준곤 목사 잠언]성령의 제3혁명운동
[김준곤 목사 잠언]반드시 건너야 할 지성의 강
[김준곤 목사의 잠언]주의 영이 계신 곳에
[김준곤 목사의 잠언]나를 부르는 음성
[김준곤 목사의 잠언]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김준곤 목사의 잠언]민족 복음화의 꿈
[김준곤 목사의 잠언]십자가
[김준곤 목사의 잠언]열정 없이 위대한 것이 된 일은 없다
[김준곤 목사의 잠언]성(聖) 개념
[김준곤 잠언]차든지 덥든지 하라
[김준곤 목사의 잠언]이단의 조건
[김준곤 잠언]죄의식 치료의 최고 묘약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9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