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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7.04 [07:56]
예수냐, 바라바냐?
나균용 목사 칼럼
 
나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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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수냐, 바라바냐?

(마태복음 27:15-26)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찌됨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27:21-26)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냐, 바라바냐?” 여러분들은 이 두 사람 중 누구인가? 물론 여러분들에게는 물어보나마나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던 때에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물어보나마나한 문제였다. 그런데 우리의 대답은 예수님인데 반하여 그들의 대답은 바라바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가장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1. 예수님을 살리려는 빌라도의 노력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있으셔서 잡혀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잡혀 오셨음을 잘 알았다. 본문 18절에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라고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살려야 하겠는데, 유대인들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여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았다. 그 사실은 누가복음에 더 잘 나타나 있다. 대강 요약하면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 제일 먼저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헤롯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빠지려고 하였다.

누가복음 23:5-7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라는 말을 빌라도가 듣고는 묻기를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헤롯의 관심은 예수님을 재판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었는데, 그 소문은 모두 예수님이 무슨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이 분명히 어떤 기적을 행하지 않을까 하여 그런 기적을 보려고 하였다. 아마 예수님이 헤롯 앞에서 깜짝 놀랄만한 기적들을 행하셨다면 절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보호하여 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다. 헤롯은 실망하였다. 오히려 예수님을 업신여겼다. 자기에게 예수님 소문을 들려주었던 자들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네가 내 앞에서 기적을 행한다면 너는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무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고, 그의 물음에 시종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는 실망하고 분노하여 예수님을 도로 빌라도에게 보내고 말았다.

이것이 헤롯의 그릇, 곧 그의 인간됨이었다. 예수님을 보되 무슨 마술 같은 것이나 하는 사람 정도로만 알았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기적이 일어났다고만 하면 무조건 따라간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나면 진짜이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가짜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는다면 무엇을 물었을까? 진리를 알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이 눈에 보이는 기적만 찾는 자들에게는 예수님도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 10, 20, 아니 50, 60년을 교회에 다녔다고 해도, 그 생각을 고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또한 진리에 이르지도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천국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우리를 그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오셨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적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슬프셨다. 헤롯이 예수님에게서 실망을 느꼈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헤롯에게서 더욱 큰 실망을 느끼셨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실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다. 예수님을 떠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도 그들을 보시면서 실망하신다는 사실이다. 자기들이 지혜롭고 잘난 줄 알지만, 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자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가? 우리는 제발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2) 빌라도는 둘째 방법으로 예수님에게 곤장을 침으로 재판을 끝내려고 하였다.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가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가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23:14-16)라고 하였다.

빌라도의 이런 판결도 물론 옳은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곤장을 맞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없애라!”라고 소리 질렀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백성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의 사주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을 존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이 저마다 똑똑한 척하고, 자기를 자랑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모두 인간들의 가르침만 따라간다. 왜 그럴까? 우리 속에 악이 들어 있는 한 우리는 선을 택하지 못한다. 오직 악만 택하고 그 악의 길로 달려갈 뿐이다.

 

3) 빌라도의 셋째의 마지막 방법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명절을 맞게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줌으로 그 명절을 축하하고, 유대인들의 풍습을 존중해 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으로 하되, 유대인들이 절대로 용서해 줄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예수님을 제시하면 그래도 예수님을 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바라바를 택하여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였다. 차라리 바라바를 석방시키라고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빌라도로서도 깜짝 놀랐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대관절 예수라는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들이 이토록 아우성을 치며 죽이라고 하는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대인들을 선동하였다. 이것이 인간들의 완악함이고 동시에 인간들의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나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실은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빌라도는 크게 실망했다. 아마 그에게 있어서 이때가 가장 마음 아팠던 때였고, 자기가 총독이 된 것이 후회스러운 때였을 것이다. 그는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다 대답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4-25)라고 하였다.

 

2.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택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선택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도 항상 이 문제가 가로놓여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삐끗하면 영원한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항상 잘못된 것을 택하면서 살았다. 참을 버리고 거짓을 택하였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택하였다. 그리스도를 버리고 벨리알을 택하였다.

공동번역 성경의 이 본문엔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라고 했고, 이어서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라고 되어 있다. 바라바의 이름도 예수였다는 것이다. 이런 번역은 원래 헬라어 성경의 어떤 사본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인데, 영어성경들 중에는 NEB(New English Bible)에 그렇게 되어 있다. 원래의 이름은 바라바 예수였던 것 같다. 성경학자들의 견해로는 후에 예수님과 혼동이 될까봐 바라바의 이름에서 예수란 이름을 빼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라바라는 말은 원래 바르 아빠. 아버지의 아들또는 아바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1) 이 사람이 누구였나에 대하여 복음서들은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15:7)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은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인하여 옥에 갇힌 자”(23:19)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은 단순히 유명한 죄수”(27:16)였다고만 하였다.

이 세 곳의 말씀을 종합하여 볼 때에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좋게 보는 것으로 아마 그는 유대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로마에 반항하는 독립운동 단체의 수령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때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수령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둘째로는 나쁘게 보는 견해인데,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반정부 투쟁을 하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던 자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유대인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으며, 또한 오늘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다.

 

2) 유대인들은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버리고 생명을 약탈하는 바라바를 택하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려는 사람처럼 보이고, 생명을 약탈하는 바라바는 오히려 생명을 주려는 자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눈에는 생명을 주시려고 자기를 희생하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비겁하고 약하게 보이고, 생명을 약탈하기 위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바라바는 오히려 용감하고 강하게 보인다.

우리 눈에는 생명을 주시고자 죄의 용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너무 미지근해 보이고, 우리의 생명을 약탈하려고 적에 대한 복수를 외치는 바라바는 오히려 화끈하고 멋지게 보인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 조직을 보라. 그들은 자살 폭탄 테러를 하도록 시키면서 그렇게 자살하는 순간에 너희는 천국에 곧장 가게 된다.”고 가르친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그런 말에 속아서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하기는 김일성이 특수부대 요원들을 훈련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고 끊임없이 공비들을 남파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젊은이들은 그런 테러 행위가 멋지게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복수를 엄금하셨다.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하였고, 나아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12:19-20)라고 하였다. 그러니 예수님의 교훈은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가?

 

3) 유대인들은 거룩한 삶을 외치시는 그리스도를 버리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기를 선동하는 바라바를 택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생명을 주시고자 회개를 외치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자처럼 보이고,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자 값싼 칭찬을 해 주면서 사지로 몰아내는 바라바는 오히려 우리를 가장 위해주고 높여주는 사람처럼 보이고 또한 남자답고 멋지게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이단처럼 보이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다 구원을 받는다.”라고 가르치는 자는 오히려 정통이요, 가장 복음적인 자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눈에는 성령을 받아 거룩해야 한다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자기들만 거룩한 척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교만하게 보이고,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도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가르치는 바라바의 제자들은 오히려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교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문제다. 바라바의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하고 경각심을 준다고 해도 우리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무익한 변론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1) 자기의 선택이 잘못되어 있음을 먼저 깨달아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헤롯처럼 이적 같은 것을 보는 데에 있지나 않는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생의 지혜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부지런히 진리를 구하고 찾아도 만나기 힘든데, 만일 진리에 관심도 없다면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그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는 예배의 문제를 질문하였고, 또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4:20,25).

제자들도 하나같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1:6)라고 물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회개해야 한다. 관심이 바뀌어야 한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전심으로 하나님 만나기를 구해야 한다.

악한 지도자, 악한 동무의 말을 따라갔던 일을 깨달아 회개해야 한다.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듣다가 영원한 멸망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합 왕은 아내 이세벨의 말을 듣다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되고 말았다. 솔로몬을 이어서 왕이 된 르호보암은 늙은 대신들이 간하는 바른말을 버리고, 젊은 친구들이 아첨하는 말을 듣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라고 포악한 대답을 하였다. 결국 나라가 갈라지고 망신을 당하는 큰 불행을 만났다.

사람이 어리석어지면 최상의 길을 버리고 최악의 길을 택하고, 또한 그 길로 달려가게 된다.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 과연 옳은 길이었나? 성경 말씀에 비추어볼 때에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만한 길이었나?

두 예수가 있다. 하나는 흉악무도한 살인강도이고, 또 한 분은 온 인류의 구세주, 아니 나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친히 못박혀 죽으신 나의 구주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주님의 가르치심과 뜻은 저버리고, 악한 살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이것을 깨달아 회개해야 한다.

 

2) 나는 바른 길을 택할만한 지혜와 지식이 없는 것을 깨달아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찬송가에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합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아무 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아기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하였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말세 교회의 모습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에 나타나 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3:17)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3:18).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 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것들을 구경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해야 한다.” 곧 연단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한다. 환난과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11:6). 그런데 이 금을 예수님께 와서 사라고 하신다.

또한 우리는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흰옷이 무엇일까? 신부가 입을 흰 세마포는 성도의 거룩한 행실이라고 하였다(19:8). 우리가 거룩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

 

3) 나아가 우리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야 한다. 왜 그런가? 세상에 온통 소경들이 가득하다. 신령한 안약을 발라서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 안약은 무엇일까?

첫째 안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진리이기에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시편 19: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 자신을 살펴보라고 하신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라고 하던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비로소 나를 불러주시고 일꾼으로 써 주신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자. 내가 얼마나 큰 악인인가를 깨닫자. 내가 얼마나 무능한 자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안약은 성령이다. 성령이 오시면 내 영혼이 살아난다. 눈을 뜬다. 새로운 세계를 본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죄악의 길을 버리고 생명의 길을 가게 만든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의 길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 성령이 없으면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빌라도를 보자. 총독이라는 최고 권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지 않았다. 왕이라고 해서 자기의 소신을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살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얼마나 담대해졌던가?

이 세상은 어차피 그릇되어 있다. 불의가 의의 자리에 앉아 있고, 의는 문밖에 쫓겨나서 설 자리도 잃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 없이 살다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인생에 실패를 자초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준다. 우리 삶의 능력을 새롭게 해 준다. 거룩한 사역에 새로운 승리를 가져다준다. 성령이 오셔야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강과 희락이 있다. 특히 의에 대한 마음이 불타게 된다. 장차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저 영원한 천국이 보이게 되고, 그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진다. 성령이 오셔야 내가 바로 깨달은 것을 끝까지 견지하고 주장할 수 있다.

셋째의 안약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그 보혈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우리 영혼을 밝게 한다. 주님의 보혈을 당신의 마음에 바를 때에 죄가 씻겨나가고, 온갖 재앙이 우리를 뛰어넘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새롭게 깨달아지고, 그 사랑이 한없는 감격과 기쁨을 주면서 기꺼이 자신을 바쳐서 충성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 아멘.

             
<< 나균용 목사 >>



*** 타코마 오아시스 교회 설교 목사 나균용 목사 아내입니다.

시인(순수문학), 소설가(창조문예)
저서: <성극각본집 3권>: "나은혜 성극각본집 1권", "행복을 주는 천사 2권", "
"용서의 권세 3권"

<수필집>: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행복한 삶의 고백", 독수리같이 새롭게" "새벽단상"

미디어 한국 칼럼집 :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
시 집 : "물 긷는 여인들"


<단편소설집>: "황금종이 울리는 길"

*** 워싱톤 주 미디어 한국 칼럼리스트(현)
*** 아틀란타 크리스찬타임스 칼럼리스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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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1/08 [16:53]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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