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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18 [04:02]
고난주간 특별 설교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라(벧전 2:18~25)
 
정준모

고난주간 특별 설교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라(벧전 218~25)

 
정준모 목사 

▲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참된 영성을 무장하라  ©뉴스파워 정준모

 

2019년도 고난 주간을 앞두고 베드로 사도가 오늘 날 성도에게 정곡을 찌르는 말씀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라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 언급 조차 스스로 낯이 붉어지는 오늘의 시대에, 정작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깊이 묵상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결단하는 갓이 성도로서 우선순위가 아닌가 깨닫게 된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가 모인 공동체로서 제자란 의미를 깊게 묵상하고 제자란 말을 많이 활용하고 진실한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 제자란 말이 결코 생소한 것이나 사람의 생각에 만들어진 어떤 쓰기 좋은 말이 아니다.

 

제자로 삼는다.󰡓 동사형이 신약성경에 복음서 6회 기타 성경에 19번 등 20번이 나온다. 그리고 󰡒제자󰡓란 명사로 약 264회 나온다. 대부분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제자라는 말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 세상에서도 제자란 말을 얼마나 사용하지 않는가? 물론 성경에도 일반적인 의미로 제자란 말로 사용된 곳이 많다. 가령, 모세의 제자들(928), 바리새인의 제자들(218) 등처럼 학문을 배우는 학도, 어떤 스승의 문하생, 직업훈련을 받는 자는 너무나 딴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랍비세계 곧 세속적으로 제자란 학생들이 선생을 택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배움의 목적에 따라 자신의 입장과 취향에 따라 가르침을 받을 자를 택한다. 그리고 자신이 배울 것을 다 배우면 그 스승을 떠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전혀 다르다. 제자인 그리스도인이 스승되시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택한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그리스도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부르시는 주도권을 가지고 제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세속에서처럼 배울동안만 스승에 복종하고 다 배웠다고 생각될 경우 스승을 떠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신 주님께 영원토록 복종하고 그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제자란 주님에 의하여 주님을 위하여 부르셨다는 절대적 명제가 있다.

제자는 배우자요 훈련된 자요 따르는 자이다. 여기서 특별히 제자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이다. 따라가는 자에게 마태복음 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3가지 의미를 부여하셨다.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여야 한다. 따라가야 하면 주님만을 따라가야 한다. 따라가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첫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고 둘째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 본문 말씀(벧전 218~25)은 사도 베드로가 기록한 말씀이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의 의중에는 지난날 참으로 기억조차 하기 싫은 치욕적인 자신의 실패를 살 깊이, 뼈 깊이 느낀 나머지 이 말씀을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여러분이여, 예수 제자된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결코, 부디 나처럼 실패하지 마시오.󰡓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였다고 본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제자 중 수제자가 되었던 베드로이지만 막상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하여 잡히시던 전날밤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제자답지 못하게, 수제자답지 못하게, 자신이 호언장담한 것답지 못하게 결국 계집종에게 예수를 부인하는 창피스런 굴욕을 하고 만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디베랴의 만남과 과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3번의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확인을 받고 새사람이 되어 성령충만하여 복음 전하다가 심지어 주님의 죽는 모습까지 따라 주님처럼 죽되 주님보다 더 겸손하기 위하여 거꾸로 메어 달려 순교한 베드로 사도가 남긴 이 말씀은 가장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또한 실패를 경험했던 제자요 결국 부르심을 그의 생명을 드림으로 꽃피우고 열매 맺었던 예수 제자, 한 베드로 선배님의 성령의 감동에 따라 기록한 이 말씀을 오늘 21세기 예수 제자의 길을 걷는 우리 후배 제자에게 너무나 큰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우리의 제사 선배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은 주님의 사신 자취에로의 부르심이다고 밝히고 있다.

 

1. 주님이 사신 자취에로의 부르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난에로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이 항상 고난의 길만 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또한 고난 그 자체를 찬양하는 고행주의가 곧 기독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신 길이 세상과는 달리 좁은 길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길이기에 고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먼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2.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이 무엇일까?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은 무엇일까? 그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고난이요 십자가이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의 고난을 아주 실제적이고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갈라디아서 312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율법의 심판으로 마땅히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님이 우리를 위한 저주받으시기까지 하신 고난의 발자취는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고 그분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고 그분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은 묵묵히 그분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3.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을 수 있는 고난이 무엇인가?

 

1) 교회를 위한 고난이다.

 

내가 늘 좋아하고 깊게 묵상하는 구절이 있다. 골로새서 124절 말씀이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바울은 그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당하는 고통,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그의 제자들에게 남겨 놓으신 고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고난이다. 이 고난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이 과목은 소극적 자세에서 적극적 자세를 취해야 할 제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주님이 제자를 구속하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제자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제자가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고난이란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여러분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시간을 바친 수고와 섬기고 봉사하기 위한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아낌없이 드린 물질,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몸을 위한 헌신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 때문에 바친 모든 희생과 봉사와 헌신이 바로 우리가 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고난이다. 여러분이 목회자로서, 당회원으로서, 제직으로서, 교사로서, 성가 대원으로서, 기도의 용사로서, 구역장과 권찰로서 주님의 지체들과 주님의 제자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시간을 소비하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 속에 채우는 아름다운 헌신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팎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자신인지 자기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용하는지 착각을 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배경으로, 노회를 배경으로, 총회를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자신의 이익을 얻고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몹쓸 자들이 많다. 그러나 여러분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여러분의 몸에 기꺼이 고난을 채우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

 

2) 예수 믿고 예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주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대적자인 원수 마귀가 항상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영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늘 함께 하신다.

 

3) 복음 전하다가 당하는 고난도 있다.

 

디모데후서 18절에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도 있다.

 

베드로전서 220-21절에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4. 고난이면서도 주님을 위한 고난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1) 자신의 실수로 당하는 고통

 

베드로전서 2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베드로전서 4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남의 일을 간섭한다든지 죄를 범한다든지 등의 자신의 잘못된 처신이나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은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위한 고난이 아니다.

 

2) 광신적인 행동, 무지한 전도 방법으로 받는 비난

 

교회가 너무 시끄럽게 하여 주위 사람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주는 일이나 지나치게 광신적인 행동으로 공중도덕과 질서를 깨뜨리다가 당하는 고통은 결코 주님을 위한 핍박이나 고난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 하라고 말씀하셨다(1016).

 

3)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문제로 당하는 어려움

 

마태복음 711절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5. 고난을 선택 아닌 필수과목으로 주셨을까?

 

보통 우리는 예수 믿고 따라 가는 것은 복받는 길이라고 말한다. 복받는 길이기 때문에 고난에서 완전 제외되는 특권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믿고 주님을 따르면 현실적인 모든 아픔과 고통과 고난이 절대로 침범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결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가는 길이 만사 형통하고 제자의 길에는 비바람도 몰아치지 않고 그들이 탄 배는 노도 광풍과 파도가 치는 법이 없는가? 결코 아니다. 어찌 의인 욥에게 그런 고난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욥같이 좁은 단칸방에 갇혀 하루 해가 넘어가는 성도를 본다. 목사로써 심방가서 참 곤란하다.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는 말이 진정코 현실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고 위로가 되겠는가? 또한 성도가 가는 길이 복되다고 하는 말을 어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라고 노래할 수 있겠는가? 믿음의 복이 결코 고난을 제거하는 해독제가 아니다. 항상 순탄의 길을 보장하는 보증서가 아니다. 물론 제자가 되는 것이 언제나 고난의 길을 걷고 고통이 떠나지 않고 씨름해야 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돌보심이 결코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과 고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특권과 고난이라는 상관관계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우리가 현실적으로 매일 만나는 문제이다. 그러나 먼저 제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의식이 개혁되어야 한다. 복과 고난이 서로 적대 관계요 서로 배치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복이 있으면 고난이 없고 고난이 있으면 복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바로 세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복의 개념이다. 성경은 복 속에 고난이 있고 고난 속에 복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최고의 복은 바로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고 밝히고 있고 제자의 길은 곧 고난의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구약의 믿음의 순례자들을 보자. 히브리서 11장에 수많은 믿음의 선열들이 나온다. 그 중에는 믿음으로 적을 무찔러 승리한 기드온, 삼손, 다윗과 같은 용장도 있지만 어떤 믿음의 제자들은 믿음을 지니고도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을 맞기도 하고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며 심지어 순교하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3-14절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무작정 고난을 찬미하는 고행 주의를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 즉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 자체를 복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고 그 고난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심지어 즐거워하라고 한 이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가 상식으로 절대로 이해될 수 없다. 믿음의 조상, 구약에 대표적인 믿음의 길을 걸었던 제자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전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역대하 207절 말씀처럼 󰡒주의 벗󰡓이라고 부를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아브라함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쾌히 임한 아브라함,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었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과연 그에게 고난의 역경을 그냥 통과시켰을까? 결코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약의 제자, 하나님의 친구, 믿음의 조상에게도 예외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도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곳이 결코 앉아서 호의호식하는 궁궐이나 태평 천지가 아니었다. 믿음의 조상이 가는 길이었지만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만났다(125). 부르심을 받은 제자였지만 애굽의 피난길에 오른 적도 있다(1210). 언약의 백성이었지만 적의 침입을 당했다(1411-16). 그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삭에게 고난이 예외 되었는가? 결코 아니다. 이삭은 결혼 후 20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볼 수 없는 고난이 있었다(2520, 26). 흉년을 당하여 고통을 당할 때도 있었다(261). 블레셋 사람과 그랄 사람 때문에 애써 물줄기를 찾아 수고하여 깊이 파 놓은 샘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고통도 받았다(2614-22).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고난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켜 주시고 믿음으로 영원한 승리를 보증하신다는 말씀이다. 바로 이 땅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하늘에서 기필코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욥기의 중요한 교훈이 무엇인가? 어찌하여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가 라는 질문보다 그러한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통 중에서도 능히 경배할 가치있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그렇다. 무화과 열매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의 결실 때문이 아니다. 외양간의 소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 없음의 고통, 전쟁의 폐허의 잿더미 그 자체는 피하고 싶으나 피할 수 없는 당면한 현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소망이 있고 보이는 것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 채워지는 놀라운 믿음의 비밀과 신령한 복이 있기 때문이다.

 

풀무불 속에 던지움을 당하여 육신의 고통의 종착역이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무엇이 다니엘의 친구들은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고 단호하게 자신있게 󰡒하나님이 능히 풀무불 가운데서 건지실 것이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란 무슨 말인가? 불타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죽음 앞에서 용기백배할 수 있는가? 그들은 고난이 곧 영원한 복에로 연결되는 사닥다리임을 알았다.

 

고난을 비겁하게 회피하거나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적당히 타협하는 가짜들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고난이 곧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임을 깨닫고 기꺼이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 풀무불이 복이다. 어찌 복인가? 풀무불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복,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는 복을 받았다. 사실 견디고 참기 어려운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역사하심의 신비스런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믿음의 비밀을 가질 수 있다. 그 비밀은 다음 또 닥쳐오는 고난을 또 한번의 하나님의 역사의 체험의 기회로 삼게 되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파도 타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다. 수영을 못하고 파도를 겁을 내는 사람은 파도가 무섭기만 하다. 그러나 파도를 타면서 그 파도의 밀려감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파도를 매력으로 느끼고 즐긴다.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위한 제자로서의 고난을 진다는 것은 제자들이 마지막 자신들과 주님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믿음의 체험을 가지게 된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 복을 누렸던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자. 그리고 여러분의 간증을 들어보길 바란다. 아마 여러분 한분 한분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한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믿는다. 일전에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끼쳤던 최남수 목사님의 경우도 그가 온갖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나와 엎드렸을 때 주님이 그에게 예수꾼 만들기, 성령꾼 만들기라는 고난 속에서 주옥같은 보화를 얻을 수 있는 복을 주지 않았던가?

 

바울은 고린도후서 1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시편 41절에 󰡒고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환난 자체를 반드시 없애 준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우리들이 환난과 상관없는 환난 밖의 어떤 복들을 누린다면 환난 중에서 나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게 환난이 없다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히 나만이 체험할 수 있는 위로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환난이나 고난 그 자체를 예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억지로 고난을 자청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또한 그릇된 행실로 빚어지는 고난도 물론 강력하게 금하고 있다베드로전서 4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다만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성도, 주님의 제자들에게 지워지는 십자가가 있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적인 복은 고난과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감당해야 할 고난이 있다. 그 고난을 피하지 말라. 그 십자가를 기꺼이 져라.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또 다른 축복의 우물을 찾게 하는 기회이다.

 

성경은 심지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의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다.󰡓라고까지 복에는 그림자처럼 고난이 병행하고 고난의 그릇 속에는 복이 담겨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시편 기자는 405절에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 받은 은혜, 그 체험이 수없이 많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기자는 12절에 이처럼 넘치는 복에 비해 고난도 넘친다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라고 덧붙였다. 무수한 재앙이란 고난 속에 하나님의 베푸시는 기적,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손길을 체험했노라고 노래하고 있다.

 

시편 3919절에도 󰡒의인의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도다.󰡓라고 고백하였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6. 주님이 가신 자취를 따라간 제자들에게 주실 상급은 무엇인가?

 

1) 참 제자임을 알 수 있는 시금석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1320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 중에 󰡒네 가지 밭󰡓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였다. 말씀의 뿌리가 없는 자는 고난이 임하면 곧 도망가 버린다. 고난은 바로 우리가 진정한 제자인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요한복음 1519절에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 속한 자이기에 주님을 싫어하는 세상은 그들이 싫어하는 주님의 제자들을 또한 주님 때문에 싫어하게 된다. 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할 때, 과연 우리가 주님의 제자이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핍박 속에서 오히려 감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멋이 여기에 있다. 신문에 취업 광고가 있어서 어떤 성도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그 회사가 이름은 있고 좋은 곳이라고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싫어한다.(우방 주택)

 

2)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히브리서 1210절에 󰡒저희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다니엘은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연단의 풀무불 속에서 모든 찌꺼기는 녹아 없어지듯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성품에로 바뀌어진다.

 

성경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라고 밝히고 있다(53).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고난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인격을 배우고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자존심이 꺾어지고 혈기가 녹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닮아가게 된다.

 

3)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주님은 그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 외면하시거나 방관하시지 않고 그 고난의 현장에 찾아 오신다. 삼킬듯이 덤벼드는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에 이는 죽음의 풍랑을 고요케 하시므로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케 하셨다. 물 위로 걸어가실 때 그들이 당황하면서 쳐다볼 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심시켜 주시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케 하셨다. 온 몸에 매를 맞고 착고에 채여 깊은 옥중에 던짐을 받은 바울과 실라가 받은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그들만 체험할 수 있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는 이가 고통을 당할 때 그 아픔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그의 제자가 고난을 당할 때 쏜살같이 달려 오셔서 그 고난을 대신 져 주실 것이다. 한번은 스펄젼 목사님이 질병으로 몹씨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찾아와서 목사님을 위로하여 주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은 󰡒내가 확실히 아픕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픔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아픔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라고 말하였다.

 

제자는 그의 아픔보다 더 가까이 와 계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영광의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과 그의 몸된 교회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인생 길을 살아갔던 위대한 예수의 제자였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 제자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다음과 같은 빛나는 체험적인 고백을 노래하고 있다.

 

로마서 817󰡒자녀이면서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또한 18절에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밝혔다.

 

계시록 21장은 성경의 마지막 부분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계시의 말씀이다. 메시아의 왕국이 열리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이 신천신지의 세계에서 부활을 참예하는 주님의 제자들의 상급을 기록하여 놓았다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당하고 짐승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을 격찬하고 영광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핍박받는 자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배하는 주인공이 될 것을 밝히고 있다.

 

계시록 210󰡒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결론적으로 영국의 목회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왓슨은 고난은 제 3의 성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세례와 성만찬 못지않게 고난은 진정코 주님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고 또한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 그 자체가 고난이다. 그러나 현재 고난의 길은 바로 내일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



정준모 목사 《선교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현,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Bible First Church)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및 뉴라이프 포커스 미션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칼럼니스트, 뉴스파워 미주 총괄 본부장, 전 대구성명교회 22년 담임목회 및 4200평 비전센터 건축 입당,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세계선교이사회)총재,GSM(미국 선한목자선교회)전 국제부대표 및 현 고문, 전 교회갱신협의회 대구 경북 대표, 한국 만나(CELL)목회연구원 대표,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 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기독교 교육과 교사 영성》 《생명의 해가 길리라》,《21세기 제자는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등 30여 졸저가 있습니다. 자비량 집회 안내:농어촌, 미자립, 선교지 “상처입은 영혼 -치유 회복 부흥집회”를 인도합니다(기사 제보 및 집회 문의 연락처 jmjc815@hanmail.net, 719.248.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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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10 [07:4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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