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파워인터뷰생활/건강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9.09.22 [00:02]
올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6]
 
정성민

앞서 말했듯이 팔정도는 삶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비법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석가가 깨우친 구원론이다. 석가가 말하는 구원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석가는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 이제부터 석가가 말하는 구원의 비결 가운데서 그 첫 번째 방법인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1.과연 올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올바른 견해는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는 식의 세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어쩌면 유신론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올바른 견해는 신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불멸의 자아(영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결국 올바른 견해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아무것도 없다라는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석가가 말하는 올바른 견해는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으로 나뉜다. 먼저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바로 업(선행과 악행)과 업보(전생에 지은 악행에 대한 보복)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말한다. 이는 우리가 행하는 도덕적인 선과 악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행하는 각각의 행위들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행위의 주체자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석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지한 자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겨난다면, 그가 만든 그러한 업은 크거나 작거나 무릇 자신이 받아야 하며 남이 받을 수 없다.[1]

 

악한 짓은 스스로 죄를 받게 되고 착한 일은 절로 복을 받게 된다네.

또한 각각 인연이 익게 되면 죄와 복은 스스로 대신하지 못한다네.

선을 익히면 선업을 얻게 되는데 역시 달콤한 종자를 심은 것과 같으니라. (법구경, 165)

 

앞서 말했듯이 업(선행과 악행)의도적인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을 단순하게 하나의 무의식적인 행위나 행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업은 바로의도적인 행위나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업보는 단순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이거나 의지적인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각자의 업에 대한 업보, 즉 그 책임이나 결과 혹은 보상은 그 행위의 주체자인 각자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사람의 출생에 따라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고귀한 자가 된다고 말한다.

 

어느 날 브라만 출신의 두 학자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 질문한다,

 

세상의 눈으로 출현하신 고따마께 묻습니다.

출생에 따라 고귀한 님이 됩니까?

행위에 따라 고귀한 님이 됩니까?

어떻게 고귀한 님을 알아보는지, 무지한 저희들에게 말씀해주십시오. (Stn.599)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답한다,

 

태생에 의해 고귀한 님이 되거나 고귀한 님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고귀한 님이 되기도 하고, 고귀한 님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Stn.650)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사람들은 행위에 매어 있습니다. (Stn.654)

 

결국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행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행하는 도덕적인 선과 악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가 곧바로 해탈의 길로 이어질 수는 없다고 한다.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우리가 행하는 선과 악에 대한 도덕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법칙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자연법칙이다.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주체자인 각자가 자신이 행한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도 이러한 석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말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16-21)

 

예수에 의하면, 이 땅에서 각자가 행한 그대로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천국에서 그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2)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선한 행위를 실천해야 한다. 과보, 즉 자신이 행한 행위들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을 의식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한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29-30)

 

결과적으로 예수와 석가는 행위의 주체자인 각자가 자신이 행한대로 보상이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또한 했으면서 안 했다고 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둘 다 똑같이 행동이 비열한 사람들이라 사후 내세에 동일한 업보를 받는 자들이 된다. (Stn. 661)

입이 험하고 진실하지 못한 천한 자여, 산 것을 죽이고 사특하며 악행을 일삼는 자여,

비루하고 불행하고 비천한 자여, 이 세상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

그대는 지옥에 떨어진 자이다. 죄악을 짓는 자여, 그대는 불익을 위해 먼지를 뿌리고, 참사람들을 비난한다. 온갖 나쁜 일을 하고 나서, 오랜 세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다.

결코 어떤 행위도 없어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그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

죄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내세에 자신 안에서 그 괴로움을 발견한다. (Stn.664-66)

 

예수는 사후에 벌어질 우리가 행한 선과 악에 대한 실제적인 심판을 믿었다. 그렇다면 과연 석가도 사후의 심판을 믿었을까? 우리는 석가가 말한 내세가 실제적인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장하는 자연과학 법칙인 연기법 그리고 무아론에 따라 추론을 한다면, 석가가 말하는 내세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말하는 과보(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보상)는 자연의 이치에 따른 이 생에서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결단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다음은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은 궁극적인 해탈로 이어진다. 이는 석가가 깨달은 세계관을 말한다. 석가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통찰하는 것,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2]

 

결국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석가가 깨달은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고집멸도)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우리를 윤회의 전 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최고의 경지, 즉 해탈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사성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나 통찰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점이다. 결국 성스러운 올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통찰력을 말한다. 그래서 이를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라고 말한다.[3]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진리를 꿰뚫는 올바른 견해는 올바른 집중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깊은 삼매(정신통일)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삼매에 들어 거센 흐름을 건너고, 가장 뛰어난 견해로써 진리를 알고,

번뇌가 부수어져 최후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 (Stn.471)

 

눈을 아래로 뜨고, 기웃거리지 않으며, 선정에 들어 확연히 깨어 있어야 하고,

삼매에 들어 평정을 닦아 사념의 경향과 악행을 끊어버려야 한다. (Stn.972)

 

무명이 머리인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새김과 삼매와 더불어,

의욕과 정진을 갖춘 지혜가 머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Stn.1026)

 

이렇게 새김을 확립하고, 방일하지 않는 수행승은 내 것이라는 집착했던 것을 버리고,

태어남과 늙음, 슬픔과 비탄을 버리고, 여기서 자각적으로 괴로움을 여읠 것입니다. (Stn.1056)

 

결과적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석가가 깨달은 사성제의 진리에 대해 우리가 이성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동의할 때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가 깨달은 진리, 즉 인생무상, 무신론, 무아론, 사후세계의 부재 등에 대해 이성적으로 동의를 한 자들 만이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무지로부터의 탈출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힌두교적 신앙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유신론, 유아론, 사후세계의 존재, 숙명적 윤회사상과 같은 힌두교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는 이러한 힌두교의 가르침을다양한 존재에 대한 집착이라고 부른다. 올바른 견해를 깨달은 자는 지혜에 통달한 현자이기때문에 힌두교가 가르치는 다양한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또한 그는 이 세상에서는 현자이고, 지혜에 통달한 자이고

이러한 다양한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갈애를 떠나, 고뇌도 없고 바램도 없습니다.

그는 태어남과 늙음을 뛰어넘었다고 나는 말합니다. (Stn.1060)

 

3. 과연 석가의 올바른 견해가 유일한 진리일까?

 

지혜를 깨달은 현자, 즉 아라한은 석가가 주장하는 무아론에 기초하여 무신론, 사후세계의 부재 그리고 반 윤회사상과 그에 따른 인생무상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석가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라는 방식의 종교적인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석가의 가르침, 즉 그의 세계관에 동의하고 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석가가 가르쳐준 세계관이나 지혜를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이 모든 것이다. 그리고서 석가가 가르쳐주는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불교는 세상을 바라보는 석가의 관점, 즉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만이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석가는 말한다,

 

진리는 하나일 뿐, 두 번째 것은 없습니다.

아는 자는 아는 자와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각기 다른 진리를 찬탄하므로, 수행자들이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Stn.884)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도 자신의 가르침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9-13)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4)

 

사도행전도 예수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도행전 4:12)

 

과연 예수와 석가, 누구의 가르침이 올바른 견해일까? 누구의 견해가 우리를 죄에서 그리고 삶의 고통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이를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와 석가가 말하는 구원의 비결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92쪽에서간접인용.

[2]Ibid, 95쪽에서간접인용.

[3]Ibid, 96.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8/23 [13:09]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연재소개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연재이미지1
예수와 석가가 꿈꿨던 세상의 차이는?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2)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1)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2)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1)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2)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1)
올바른 정진은 무엇일까?
올바른 생활은 무엇일까?
성 생활에 관한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올바른 행위는 무엇일까?
올바른 언어는 무엇일까?
올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올바른 사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팔정도란 무엇일까?
건강한 금욕주의는 무엇일까?
석가가 깨달은 중도는 무엇일까?
과연 석가는 신비주의자일까?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9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