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보고대로 216에 소재한 완도성광교회 정우겸 목사는 1982년 11월 30일 이 교회 초대 교역자로 부임해 지난 41년 간 목회하면서 ‘1인 1사역’이라는 획기적인 방침으로 교회를 세워왔다. 1인 1사역은 한국 교회 최초의 실험이자 성공적인 평신도 사역으로 자리매김했다.
▲ 완도 성광교회. 평신도사역위원회가 많게는 800여 개에서 지금은 614개가 있다. 1인 1사역을 한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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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성광교회는 완도중앙교회에서 출석하던 고월출 장로 등 40명의 성도들이 교회개혁과 바른 신앙의 기치를 들고 나와 1980년 9월부터 예배를 드리다가 예장통합 목포노회의 허락을 받아 한 달 후인 10월 10일 교회설립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1월 30일 초대 교역자로 정우겸 전도사를 청빙했다.
정 전도사는 이듬해인 1983년 2월 28일 목사안수를 받고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정 목사는 당시 27세였다.
정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견지했다.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을 등록교인으로 받지 않은 것이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막으면서 교회 간의 갈등을 예방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책임, 목회자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장신대 신대원에서 공부를 할 때는 ‘현대신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 동아리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정 목사는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1986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완도군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차관훈 선생(김대중 전 대통령 처 조카, 민선 완도군수 역임)과 함께 종교계를 대표해 위원장을 맡았다.
“당회 모임 때 교회 장로들이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하면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자 예언자적 사명은 구약성경 예언서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설명하면서 만일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할거라면 저는 교회를 사임하겠다고 말하자 당회원들이 ‘목사님,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정 목사는 차관훈 선생과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이왕이면 신앙 생활을 하면 좋겠다고 권면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차 선생은 그 다음 주일부터 그가 살고 있던 완도읍 화흥리 화흥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차 선생이 안수집사 임직을 받을 때는 권면을 통해 ‘안수집사로서의 본분을 잘 감당하지 못할 거면 지금이라도 임직을 받지 않는 게 좋다.’고 권했다. 차 선생은 안수집사 직분을 잘 감당했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민선 완도군수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제2건국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때 저는 완도군 위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때 해양수산부장관 등을 만나서 바다 밑에 있는 쓰레기를 강제로 수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바다의 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기여했다. 그리고 북한의 초청으로 일주일 동안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정 목사는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앞장서면서도 교회 사역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1인 1사역을 중심으로 사역의 지경은 갈수록 확산됐다.
완도 지역사회를 품은 교회 나아가 나라와 세계를 품은 교회가 됐다. 청해진요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 어린이, 청소년 사역센터를 운영하는 등 총체적인 사역을 전개했다.
“교회 부설 기관과 사역을 하게 된 계는 외국을 다니면서 은퇴자 마을, 은퇴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였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나주대학 완도 캠퍼스를 만들어 학생을 모집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국가 자격증 2개와 협회 자격증 5개를 취득하게 했다. 그리고 졸업생들에게 교회 부설기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 교회 부설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만 200명이다.”
마치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 시대를 연 것처럼 완도성광교회는 ‘기독교 신청해진 시대’를 열어온 것이다.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농(산)어촌교회들은 미래가 불투명할 정도로 힘겨운 사역을 이어가고 있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 정 목사는 어떤 생각일까.
“농어촌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주민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문제를 풀어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처음에는 오해도 받고 효과도 없겠지만 조금 지나면 점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농어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에 살아남기 어렵다. 농어촌 교회는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아 지역에 맞는 목회자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농어촌 교회가 살아나는 방법은 교파를 따지지 말고 통합을 해야 한다.” 역시 그 다운 발상이었다.
우리나라의 최우선 최대의 과제는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농어촌에서 저출산 문제는 현실적 타격이 크다. 완도성광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왔을까.
“우리 교회는 30년 전부터 출산장려위원회를 만들었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준다는 이런 개념이 아니고 왜 우리가 아이를 더 낳아야 되는가를 신앙적․ 성경적으로 풀어서 성도들을 이해를 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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