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임현수 목사] “사랑방 같은 만남”
임현수 목사-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원로목사, GAP(세계협력선교회) 이사장, KWMC(세계선교협의회) 의장
 
임현수   기사입력  2022/10/23 [14:08]

한국CCC 62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임현수 목사     ©뉴스파워



김준곤 목사님과 간사님들과의 CCC에서의 만남은 손수건 같은 만남이었습니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만남이 아니었고, 건전지처럼 힘이 닳아 없어 지는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는 꽃송이 같은 만남도 아니었습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 같은 만남, 한 이불 덮고 한 방에서 기도하다 잠들어 버리던 사랑방 같은 만남이었습니다.

 

1972년 친구(양도철 박사)의 소개로 CCC를 처음 찾아왔고 이듬해 1973년 여름밤 그 유명했던 LTC 훈련을 받으며 김준곤 목사님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의 부르심 같은 소명을 받고 민족 복음화운동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자후를 토하시듯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목사님은 꼭 세례 요한같이 느껴졌으나 개인적으로 뵙게 된 목사님은 사도 요한같이 사랑이 많으신 주의 종이셨습니다. 종종 눈물을 흘리시는 목사님의 모습 속에서는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기도의 눈물을 흘리시는 예레미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CCC와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1년이 지나면서 한국 교회사의 오순절 역사같이 기록된 엑스플로 '74의 핵심 요원으로 발탁되어 여의도광장에서 온 정열을 불태웠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는 이 구호는 우리 민족 복음화의 구호가 되었고, 저는 19763CCC 고등부 간사로 임명받아 십대 복음화에 모든 것을 걸고 CCC 전임간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76년 여름, 설악산 대청봉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던 등반기도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목사님과의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맨 앞장서신 목사님의 기도제목을 받아 33명의 간사들이 하루 이틀 쉬지 않고 계속 걸으며 기도했습니다. 대청봉 정상에서 33명 모두가 머리털을 깎고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서원했던 것처럼 민족으로의 헌신을 약속하며 바위 밑에 머리털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추웠던 그날 밤 뜨거운 결명차로 포도주를 대신해서 주의 만찬을 거행했습니다.

 

형식상으로 볼 때는 엉터리 의식이었지만 지금도 그날 밤의 성찬식은 꼭 예수님을 모시고 가졌던 성찬식처럼 추억되고 있습니다. 형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하고 깊이 있게 주님을 따르시던 목사님의 삶에 아무런 이의 없이 따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며 저도 놀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로운 전도자의 부르심이 시작되었고, 십대 복음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목회를 돌아봐도 그때 배웠던 것을 재현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원단 금식기도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19년 동안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사흘 동안 원단 금식기도회를 갖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대청봉은 아니지만 어디든지 전 교인이 걸으며 기도합니다. 물론 제가 앞장서서 기도제목을 뒤로 전달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

 

저의 목회의 많은 내용이 김 목사님에게서 배운 것들의 재연입니다. 오히려 더 두려운 마음으로 사역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간사가 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군에 입대하게 되어서 전국간사 40일 금식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군에 입대해서 논산훈련소에서 가장 힘들어할 때 김 목사님의 편지가 한 장 왔습니다. 격려의 편지였고 군에 간 저에게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가능하면 서울에 있는 부대로 와서 사역을 부분적으로라도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이 어렵게 되었다고 친절하게 다시 편지해 주셨습니다. 그 한두 통의 편지가 제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저도 사람들에게 편지 쓸때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대구에 있는 모 부대로 발령을 받고 가서 편지를 올렸는데 기도하고 계시다면서 기회가 되면 대구CCC가 어려우니 도와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후 바로 저는 대구 시내로 발령을 받고 사복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제 기도보다도 목사님의 기도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했던 대구CCC를 조금이라도 도울수 있게 되었고 그때 만났던 형제들이 최영택(의사), 최미, 최명자, 김현숙 자매 등 CCC가 낳은 한국의 대표적인 찬양사역자들이었습니다.

 

제대하자마자 다시 CCC에 복귀해서 1980년 세계복음화 대성회를 준비하게 게 되었는데 저에게 맡겨진 분과가 청소년분과였습니다. 장충체육관에 10,000명 이상의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일주일 동안 수련회를 개최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하면서도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이런 일을 맡기시고 전적으로 믿어 주시는 김 목사님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항상 본인의 간증을 통하여 믿음을 격려해 주셨고, 비전을 제시하고 따라오게 하심으로 엄청난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1981년부터 CCC 간사 훈련소인 GCTC가 생기면서 목사님은 제1기 훈련을 받게 하시고 앞으로 훈련간사로 섬겨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GCTC 훈련을 받을 때 제1기 훈련간사로 오셨던 미국과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 온 훈련자들도 한결같이 김 목사님을 존경하며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더 존경받으시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럽고 기뻤습니다.

훈련 도중 10명이 한달 간 필리핀 단기선교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처음으로 갔던 필리핀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도 김 목사님의 위상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에게서 은혜와 도전을 받은 필리핀의 한 거부(巨富)는 엄청난 돈을 들여 김 목사님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전도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목사님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외에서 눈이 열릴수록 김준곤 목사님이라는 분의 존재는 더 귀한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기뻐하시는 종을 항상 존귀케 하셨던 것처럼, 결국은 하나님께서 김 목사님을 그렇게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목사라기보다는 간사

 

북한 땅 전역을 기차로, 자동차로 수십 번을 다니면서 지난 8년간 확연히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는 전국적으로 염소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전국적으로 눈에 보일 정도로 늘어나는 염소들을 볼 때마다 CCC 생각을 하며 조만간 예수 믿는 백성들도 저렇게 많아지리라는 환상을 품습니다. 이것도 김 목사님의 비전이 북한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CCC를 섬기고 캐나다에 와서 또 다른 20년 동안 지역 교회를 섬기면서도 지금까지 저는 김 목사님을 잊어본 적이 없으며 제가 목사라기보다는 간사라는 명칭이 아직도 편할 정도로 CCC 사람이 된 것은 전적으로 김 목사님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한국에 들르게 되면 꼭 코리아나호텔로 불러 식사와 더불어 개인적인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또한 채플에서, 수련회에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고 우리 교회의 북한 선교 사역도 늘 격려해 주셨습니다. 부족한 저의 간증을 들으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는 목사님은 정말 영원한 소년이셨습니다.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10여 넌 전에는 캐나다까지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해 주셨으며 작년 여름에는 건강이 최악의 상태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격려해 주시기 위해 우리 교회 선교대회의 강사로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신 사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님의 비전 전수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도 세계 모든 민족을 품고 기도하며 섬기는 교회가 되었으며, 한 해에 수백 명씩 단기선교사로 파송되며 14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섬기고 있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34명의 장기 선교사를 직접 파송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목사님이 심어 주신 비전의 열매들입니다.

 

그동안 목사님의 사역 40년이 파종기였다면 이제는 추수기가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셨으나 기쁨으로 단을 거두시는 추수의 축복이 남으신 생애 동안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임현수 목사는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 졸업 후 CCC 간사로 전임 사역을 하다 1985년 캐나다 토론토대학 녹스칼리지(Knox college)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틴데일(Tyndale)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큰빛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뉴욕 신학대학에서 4년간 가르쳤고, GAP신학원을 만들었다.

 

2017년 말에 원로 목사로 은퇴하고, 큰빛교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GAP(세계협력선교회) 이사장, KWMC(세계선교협의회) 의장, 중국 가나안 농군학교 이사장이며, GYKM(세계청년 선교대회)을 창설했다. 북한 선교에 앞장섰으며, 중앙아시아 선교를 개척하여 10년간 사역했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선교 개척, 인도와 서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미전도 지역 선교에 집중하고 있다.

 

TMTC(Total Mission Training Center)를 통한 100만 선교사 시대를 여는 운동과 전 세계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운동과 GTS(Golden age, Twilight age, Silver age)를 통한 시니어 선교사 개발과 통대연(통일대축제범민족연합) 운동을 통한 복음화된 통일 조국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일에 남은 생애를 걸고 헌신하고 있다.

 

 2015년 북한에 억류돼 노동교화형을 받고 2년7개월간 수감되어 있다가 2017년 8월 풀려났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2/10/23 [14:08]   ⓒ newspower
 
김준곤 목사 관련기사목록
인기기사 목록